해방 후 남겨진 과제, 친일청산
해방 후 남겨진 과제, 친일청산
  • 정해인 기자
  • 승인 2022.03.14 20: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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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배반자 심판을 막은 것은 누구인가

  2015년 개봉한 <암살>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소재로 한 작품 중 드물게 흥행에 성공했다. 일제의 밀정이 독립운동가의 총에 맞는 결말에 많은 관객이 통쾌하다는 평을 남겼다. 하지만 현실은 영화와 반대였다. 역사상 친일파에 대한 심판은 한 번도 제대로 이뤄진 적이 없으며, 그들의 재산은 후손들에게 대대손손 전해졌다. 친일파 청산의 실패는 우연이나 의지 부족의 산물이 아니다. 수차례 친일파 청산을 위한 시도가 있었지만 때마다 고의적인 방해와 협잡이 있었다.

 

  팔지 못할 것을 팔아
  누리지 못할 것을 누린 자들

  우리나라는 1905년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며 일제로부터 국권을 빼앗겼고 1945년 해방되기까지 35년 동안 식민지배를 겪었다. 식민 통치 속에서 일제는 정치·경제·문화 등 모든 영역에 걸쳐 조선 사회에 침투했다. 해방 이후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해서는 이러한 식민 잔재의 청산이 필수적이었고 크게 물적·제도적·인적 차원에서 다뤄졌다. 이 중 인적 차원의 청산이란 일제에 협조해 민족에게 위해를 가하고 국권 침탈을 도운 민족반역자, 총칭 친일파에 대한 처단을 뜻한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과 식민지를 겪은 국가 대부분은 전범이나 민족배반자 처단 과정을 거쳤다. 프랑스의 드골 정부는 1944년 파리 해방 이후 전국에 협력자 재판소를 설치해 나치협력자를 처벌했고, 형사 차원의 처벌 외에도 사회활동을 제한하는 등 넓은 범위의 제재를 가했다. 중국은 일제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뒤 1946년 *한간 재판을 전국적으로 실시했다. 남한과 같은 역사를 공유하는 북한의 경우 해방 직후 친일파 청산을 우선 과제로 삼았고, 인민재판 등의 사회주의 제도 내에서 이들을 처단했다.

  민족배반자에 대한 심판은 식민지배의 유산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립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었다. 남한도 마찬가지로 친일파에 대한 심판을 신국가 건설에 앞서 민족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는 역사적 과업으로 여겼다.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친일파 을사오적. 좌측부터 △권중현 △박제순 △이근택 △이완용 △이지용

 

  조작된 진영싸움 속
  애국자 탈을 쓴 매국노

  해방 직후부터 1945년 말 모스크바 삼상회의 전까지 남한 내에서 친일파 청산은 이념과 상관없이 모든 진영에서 수용되는 과제였다. 일제강점기 사회구조 극복을 위해 친일파의 경제적·사회적 기반 제거를 규정하고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제한했다. 이 시기 친일파 숙청은 이견의 여지 없이 신국가 건설 운동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런 사조는 신탁통치에 대한 찬반 논쟁을 기점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1945년 말 한국은 신탁통치 문제를 두고 친탁과 반탁으로 나뉘었다. 극우파는 소련이 신탁통치를 요구했다는 오보를 기폭제 삼아 반공 운동을 펼쳤다. 이를 계기로 이전까지 위축됐던 친일파 세력은 발언권을 얻었고, 그들은 반탁 세력으로 위장해 애국자로 둔갑했다. 민족반역 여부를 기준으로 애국과 매국을 가르던 논리는 반탁, 나아가 반공은 애국, 찬탁은 매국이라는 왜곡된 진영논리가 대신하게 된다.

 

  친일파 공화국과
  반민특위의 와해

  좌파의 세력이 위축된 가운데에도 1947년 7월 2일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하 입법의원)은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이하 친일파 숙청법)’을 통과시켰다. 남한 최초의 제도적 친일파 숙청 시도였다.

  친일파 숙청법은 미 군정의 반대와 방해에 여러 번 난관을 겪었다. 당시 미 군정은 일제강점기의 관료기구 유지와 친일 관료 등용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미 군정 내 행정관료는 친일파 또는 그 두둔 세력으로 채워졌는데 그중에는 조선총독부 체신국 출신 길원봉, 조선총독부 교통국 출신 최원경 등이 있었다. 경찰의 경우 1946년 11월 기준 1,157명 중 949명, 즉 82%가 일제강점기 경찰 출신이었다. 미 군정의 주도 아래 친일파는 남한 사회의 주요권력에 손쉽게 침투할 수 있었다. 친일파 숙청법이 통과되자 미 군정은 인준을 거부하며 선 선거법 후 친일파 숙청법 제정을 강요했고 이는 입법의원 내에서 친일파를 두둔할 수 있는 명분으로 작용했다.

  친일파 청산은 미 군정에 의해 정부수립 이후의 과제로 미뤄졌으나 1948년 출범한 이승만 정부 역시 친일파 청산에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승만은 귀국 후부터 일관되게 친일파 처단에 부정적 견해를 취했고 정부에 친일파 출신 인사를 등용했다.

  제1공화국 각료의 34.5%가 친일 전적 보유자였다. 제헌국회는 개원과 동시에 친일파 청산 작업에 돌입하며 반민족행위처벌법(이하 반민법)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특별위원회(이하 반민특위)를 조직했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반민특위 와해 작업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했다. 이승만 정부의 방해 공작에는 불리한 예산 배정이나 자료제출 거부뿐 아니라 테러, 암살 음모와 같은 사건도 포함됐다. 특히 **노덕술 체포를 기점으로 이승만 정부는 반민특위와 첨예하게 대립했다. 반민특위가 노덕술의 석방을 거부하자 이승만은 국회를 통해 반민특위를 비판했고 반민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외에도 △국회프락치 사건 △6·6 반민특위 습격 테러 △김구 암살 등의 사건을 겪으며 반민특위의 세력은 점차 약해졌고 결국에는 친일파 청산 이라는 역할을 다하기 전에 와해됐다.

  이승만 정부 시절 주요권력을 구성했던 친일파 관료 비율은 제2공화국에서 더욱 증가했고,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 이어 전두환의 독재정권들이 들어서면서 우리나라의 친일파 청산 작업은 한동안 중단됐다.

 

  ‘골든타임’ 놓친 후에도
  친일청산 포기할 수 없는 이유

  친일파 청산 실패의 대가는 단순히 친일파 개개인에 대한 심판 기회를 놓친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들이 사회 주요권력으로 침투하는 것을 용인하며 민주주의의 가치가 위협받았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탄압하던 친일파들은 해방 후에는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민중항쟁을 박해했다. 군대가 제대로 기능하기 전, 미군의 지원을 받은 친일파 출신 경찰은 남한 내에서 가장 강력한 무력집단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들은 10월 항쟁과 제주 4·3항쟁 등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자국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학살을 자행했다. 미 군정은 친일파를 등용함으로써 자신들에게 반하는 남한의 민중 세력을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친일파들이 민족반역 전력을 은폐하기 위해 왜곡한 진영론은 희생자를 낳기도 했다. 친일청산에 힘썼던 인물 중 다수가 이른바 ‘빨갱이’로 몰려 목숨을 잃거나 안위를 위협받아야 했다. 이런 왜곡된 색깔론은 현재까지도 친일청산을 방해하는 걸림돌로 작용한다. 민족문제연구소는 2002년 친일 행위에 대한 변명이나 왜곡을 모아 ‘친일 10대 궤변’으로 발표했다. 연구에 참여한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 상임연구원은 “10대 궤변 중 친일파 청산 주장을 하는 사람을 ‘빨갱이’로 몰아세우는 ‘색깔론’은 과거 친일파의 논리를 가장 충실히 이어받은 논리다”고 말했다.

  해방으로부터 70년이 넘게 지난 현재 친일파에게 형사적 책임을 묻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대신 친일 전적을 밝히고 친일재산 일부를 국가가 환수하는 방식으로 친일청산을 실현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2005년 12월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이 발의됐다. 당시 한나라당이 해당 법안에 반대를 표하며 소속 의원 전원이 불참했지만 무사히 국회를 통과했고, 이를 바탕으로 친일재산조사위원회가 조직됐다. 친일재산조사위원회 출범 기자회견에서 이준식 상임 위원장은 “친일반민족행위자의 후손 가운데 단 한 명이라도 자발적으로 나와 친일재산을 반납했으면 좋겠다”며 “친일파 후손이라고 해서 무작정 비난해서는 안 되며, 선대의 친일 행적을 깨끗이 인정한다면 오히려 격려하고 칭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친일파 후손들의 자진 반납은 한 건도 없고 반항은 빗발쳤다.

  2011년 3월, 친일파 후손 42명이 친일재산환수 작업에 제기한 위헌소송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합헌 판결을 내린 바 있다. 헌법재판소는 “국가의 친일재산을 환수하는 문제는 역사적으로 매우 이례적인 공동체적 과업으로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며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한 3·1운동의 헌법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다”고 판결했다. 친일청산은 과거에 대한 도덕적 추궁을 넘어 미래 사회를 바로 세우기 위한 작업 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한간: 한족으로서 적과 통해 반역죄를 범한 민족반역자

**노덕술: 일제강점기 친일경찰. 반민특위 및 정부요인 암살 음모 의 주범 중 한 명으로 체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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