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회 학술문예상 소설 가작
제47회 학술문예상 소설 가작
  • 김도은(과학기술대학 1)
  • 승인 2023.12.04 18: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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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행할 수 있는 여자>

1

"사람을 죽여서 왔습니다."

 

노인은 말을 계속하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남자가 말한 건 이곳에서 별것 아니라는 태도였다.

 

"제가 제 부인을 죽였어요. 집에서 식칼로 죽였습니다. 제 목을 조르길래 칼로 허리를 찔러버렸어요."

 

말할수록 남자는 그때의 감정이 생생해졌다. 그래서 잠시 뜸을 들였다. 노인은 그 틈을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힘으로는 못 빠져나갔나? 부인이라면 아무리 자네라도 자네가 힘으로 못 빠져나갈 것도 없지 않나."

"부인은 복싱 선수였습니다. 어르신도 아시다시피 제 체격은 좀 왜소하고요."

 

그건 그렇지. 노인은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키는 170cm도 안 되어 보였고, 마른 체형이라 맥이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얼굴도 동안이라 만만해 보였다. 남자는 그런 노인의 시선이 익숙하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하여튼, 부인은 저보다 힘도 좋고 체격도 컸습니다. 팔씨름했을 때도 부인이 저를 이겼었죠."

", 그러면 홧김에 죽인 건가? 부인을?"

"홧김이라부인은 알코올중독자였습니다. 술에 취해 절 때린 건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죠."

 

'홧김에'라는 단어가 남자를 예민하게 만든 건지 남자는 표정을 찌푸렸다. 홧김이라 하긴 뭐하고, 그렇다고 계획 살인이라고 하기에도 부족한 감이 있다. 그것은 그냥 사고였기 때문에. 그래서 남자는 노인에게 부인이 알코올중독자였다는 추가 설명을 했다. 노인에게 살인의 정당성을 백번 말해봤자 달라질 것이 없었음에도.

 

노인은 여전히 그런 건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듯이 심드렁했다. 남자는 왜인지 모르게 억울함이 생겼다. 이 이야기를 이쯤 하다 보면 한 번쯤은 본인을 안쓰럽게 볼 법도 했는데, 노인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똑같이 교도소에 있는 처지라 그런 걸까.

 

"부인은 꽤 잘나가던 복싱 선수였습니다. 유명한 복싱대회에서도 몇 번 메달을 땄을 만큼요."

"그런 여자가 왜 자네랑 결혼한 게야?"

 

노인은 코를 후비며 남자의 말을 듣고 싶은 대로 들었다. 심지어 말도 아까보다 대충 내뱉는 느낌이었다. 남자는 조금 답답하고 어이없어졌지만 화내서 바뀔 일은 없었다. 애초에 화내봤자 달라질 것도 없기도 하고.

 

"부인 말로는 저라면 쉽게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서. 라고, 하긴 했습니다만."

"맞는 말이구먼."

"어쨌든 부인은 가정폭력범입니다.  2년 동안."

 

남자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눈시울을 붉혔다. 남자 자신도 주책맞게 울기는 싫었다. 또 이 과거만 생각하면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자신이 싫었다. 하지만 그 기억은 인격적으로 생애 최고의 모욕이었던지라 생각만으로 가슴이 시큰거렸다. 옆의 노인이 제 말에 공감했다면 아마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을 것이다. 남자는 차라리 노인이 자신에게 무관심에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추하게 울지 않아도 되니까.

 

남자는 아직도 부인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자신이 약간 혐오스러웠다.

 

"위로는 잘 못하니까 눈물로 풀지 말고 말해보시게. 힘들면 어쩔 수 없고."

 

노인의 말투가 조금 풀어진 것을 남자도 느꼈다.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한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정이 있긴 한 노인인가 보다. 남자는 자기 안의 노인에 대한 평가를 수정하고 말을 다시 잇기 시작했다.

 

2

그는 조용한 집안에서 자라서 그런지 예민했다. 그의 가족은 TV와 가까이 살지 않았고, 노래를 듣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조용한 것에 익숙했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정반대였다. 그녀는 노래를 트는 것을 좋아해 평소 TV에서 유튜브를 틀어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마음껏 감상했다. 노래는 대부분 시끄럽거나 하이라이트에 고음이 나와서 남자가 듣기엔 끔찍함, 그 자체였다. 그녀는 집안에 자신이 튼 시끄러운 노래가 울려 퍼지는 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행동했다.

 

그뿐만 아니다. 복싱 선수였던 그녀는 복싱 경기를 자주 봤다. 자신의 전성기를 떠오르려는 것인지 고작 이 가정에서 자존심을 세우려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경기를 보며 특정 선수들의 단점을 마구 헐뜯었다. 쟤가 저렇게 잘하는 애도 아닌데 분명히 로비가 있었을 거다. 상대에 대한 스포츠맨십이 없다. 쟤는 원래부터 저렇게 싹수도 없었다. 등등.

 

그가 아내의 친구들에게서 들은 바로, 라이벌이 있다고 했다. 무릎 다치기 전까지는 라이벌보다 약간 나은 수준의 실력이었는데, 부상 이후 판도가 완전히 뒤바뀌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TV에서 아내가 특히 욕하는 복싱 선수가 보이면 이름부터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주세운 선수. 조금 높은 수위의 욕이면, 틀림없이 주세운 선수를 욕하는 것이다.

 

하여튼 경기라고 하더라도 누군가가 싸우는 모습을 보는 것이 질색이었던 남자는 항상 화를 참아야만 했다. 처음에는 그도 차분히 말했다. 당신이 복싱 선수여서 경기 영상을 보는 건 이해하지만, 나도 이해해 달라고. 그래서 그는 자신이 없을 때 보거나 조용히 봐달라고 했다.

 

처음에는 그녀도 툴툴거릴지언정 그것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점점 같이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풀어진 탓에 집안에 다시 시끄러운 복싱 경기 프로그램이 틀어지는 건 당연한 순서였다. 그래서 그도 점점 참을성이 없어졌고, 그의 화는 고름처럼 쌓여 갔다.

 

그날은 그가 상사에게 된통 깨지고 온 날이었다. 새벽까지 들리는 시끄러운 TV 소리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던 날, 회사에서 중요한 거래처와의 미팅 중 피곤함에 사소한 실수를 저질렀다. 상사도 원래 같았으면 간단한 주의만 주었을 텐데, 돈의 앞자리 수가 다른 계약이어서 그런지 평소보다 더 예민했다. 그는 하루 종일 이 계약이 망가지면 책임질 거냐, 결혼하더니 해이해진 것 같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같은 말만 수백 번은 들었다. 물론 제 책임이 맞았으므로 죄송하다는 말을 계속하며 고개를 숙였다.

 

상사 앞에서는 두려움에 계속 죄송하다는 말밖에 생각나지 않았지만, 상사와의 대면이 끝난 후에는 분노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한참을 상사의 쪼잔함을 욕했고, 분노로 머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실수했다는 자각도 있긴 했지만, 오랫동안 고개를 숙여야만 했던 자신이 애처로웠다.

 

그리고 그 분노가 식자 슬픔으로 바뀌었고, 정처 없는 슬픔은 원인을 찾아 헤맸다. 오늘 내가 실수를 왜 했지? 그래, 어제 잠을 많이 못 잤잖아. 아내 때문에! 그 TV 소리 때문에! 그는 한순간의 다시 슬픔이 분노로 바뀌는 경험을 했다. 상사에게는 화를 내지 못하지만, 아내에게는 낼 수 있다. 이 사실에 그의 분노는 방출될지도 모른다는 기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분노는 머리를 열기로 가득 채워버렸다.

 

그나마 그는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화를 약간 가라앉힐 수 있긴 했다. 그래도 여전히 화가 난 건 맞아서, 집에 들어가서 아내가 또 TV 볼륨을 크게 틀면 단단히 주의를 줄 생각이었다.

 

역시나, 집에 들어가자마자 그를 맞아준 건 아내가 아닌 유명 연예인의 말하는 소리와 웃음소리였다.

 

, 왔어?

여보, 얘기 좀 해.“

오자마자 그게 무슨 소리야?

 

그의 낮게 깐 목소리를 의식한 건지 그녀는 표정을 약간 찌푸렸다.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 그의 짜증은 별일이 아니었으므로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과자나 부스럭거릴 뿐이었다. 그녀는 우선 얘기하라는 듯 더 말을 얹지 않고 과자를 먹었다. 그 와중 떨어지는 과자 부스러기가 그는 왜인지 혐오스러웠다.

 

내가 TV 소리 좀 줄여달라 했잖아.“

뭐? . 알겠어. 줄이면 되잖아.“

 

그녀는 겨우 그걸로 목소리를 깔았냐고 구시렁거렸다. 그리고 자존심 때문인지 보란 듯이 리모컨을 달칵거리며 볼륨을 두 단계 낮췄다. 원래부터 TV 소리를 크게 틀어놔서인지 그로서는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도발 같은 수용에 화가 더 났을 뿐이다.

 

몇 번이나 말했는데! 시끄럽다고, 어제 그래서 밤에 잠도 못 잤다고! 어제뿐인 줄 알아? 또 집안일 할 때도 시끄럽다고 했잖아!

 

그녀는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그제야 남자를 쳐다봤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방으로 들어갔다. 화를 낼 때까지는 좋았지만 약간 감정적으로 행동한 건 사실이라 갑자기 후폭풍이 두려워졌다. 하지만 그래도 화가 나는 건 사실이라 표정은 여전히 딱딱했고, 말을 취소하기엔 자존심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방문을 벌컥 열고 여자가 들어왔다. 의심할 것 없이 분노에 가득 찬 표정이었다.

 

내가 내 집에서 마음대로 TV도 못 봐? 당신이 못 잔 게 왜 내 잘못이야! 왜 오자마자 화내는데? 어? 왜 화내냐고!

못 들었어? 시끄럽다고! 계속 말하는데 귀는 어디에 갖다 버렸어?!

당신은 내가 힘들어서 TV 하나 보는 것도 이해를 못 해?! 내 집에서 편하게 살면서 그까짓 것도 용납 못 하냐고! 아주 네 집이야? 어?

 

그렇게 수십 분을 싸웠다. 여자는 너까지 날 무시하냐, 네 주제에 소리치냐고 분노했다. 남자는 처음에는 맞서 싸웠지만 여자의 위압감 때문에 점점 기가 죽어갔다. 아무리 다쳤다고 하더라도 여자에게는 여전히 선수 시절의 위력이 남아 있었다. 여자는 남성을 한 번에 꺾는 힘이 존재했다. 사회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내가, 내가 왜 그랬지. 평소처럼 내가 참았으면 됐는데. 내가 왜 그랬지. 결국 남자는 여자에게 빌었다. 미안, 내가 너무 감정적이었어. 오늘 상사한테 혼나서. 남자는 공감을 얻기 위해 말을 내뱉은 것이었으나 상황은 또 다르게 흘러갔다. 여자는 화가 난 나머지 남성에게 손을 든 것이다. 때리지는 않았지만, 남성은 여성이 자신을 위협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뭘 잘했다고 그런 표정으로 봐? 상사한테 혼났는데 나한테 화풀이하는 건 돼? 내가 무슨 네 보모냐?

 

여자도 자신이 손을 올린 건 좀 과했다고 생각했는지 아까보다 누그러지긴 했지만, 여전히 화난 태도였다. 어쨌든 이날의 싸움은 이렇게 종결 났다.

 

그리고 남자는 2일 후에 아내가 4강까지 올라갔었던 복싱대회 우승자가 누군지 알게 된다. 우승자는 아내가 그토록 욕하던 주세운이었다.

 

3

노인이 아내가 가정 폭력을 행했던 시기의 이야기부터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아 그는 일부러 아내와 맞지 않았다는 것부터 구구절절 말했다. 그랬는데도 노인은 묵묵하게 들었다. 노인은 생각보다 인내심이 있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남자는 지금까지 변호사 외의 사람에게 말하지 않았던 세세한 이야기를 꺼냈다. 어쩌면 그는 가정 폭력 이전에도 아내가 가정에서 갑의 위치였다는 것을 노인에게 인지시키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노인이 그 의도를 눈치챘는지 아닌지 그로서 잘 모르겠으나 눈치챘다면 계속 들어주기도 고역일 것이다. 남자는 노인의 눈치를 슬쩍 봤다. 노인은 다행히 졸고 있지는 않았다. 아까까지 수다스러웠던 남자가 말을 멈추자, 노인은 입을 열었다.

 

왜 더 말하지 않고?“

뭐 하실 말씀은 없으십니까?“

늙은이의 말이 필요한가?“

 

필요한 것까지는 아니었으나 아무 반응도 없는 노인이 의아한 건 맞았다. 남자는 불쑥 저 노인이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듣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졌다.

 

무슨 생각 중이신데요?“

뻔하다는 생각. 자네 부인이 다혈질이고 배려 따위 없었던 건 잘 알겠네. 그래서, 사이가 안 좋았고 그게 곪아서 가정 폭력까지 이어진 거지?“

 

다 안다는 듯이 구는 노인이 왜인지 미웠지만 노인이 무례한 건 아까도 마찬가지였으므로 그냥 넘어갔다.

 

단순히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하기엔 애매합니다. 이날을 기점으로 부인이 제게 손을 올리는 빈도가 잦아지다가, 결국 때리게 된 건 사실이지만요.“

정말로 전혀 저항할 수조차 없었나? 부인이 아무리 복싱 선수였다 하더라도 부상이 있고, 보통 남성이 여성보다 힘이 더 강하지 않나.“

저는, 누군가를 때릴 엄두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저항한다면요? 그 뒤는요?

노인은 잠시 침묵했다.

 

미안하네. 자네의 상황을 잠시 잊었군.“

 

남자는 노인의 깔끔한 사과에 순간 벙쪘다. 그래서 그도 , . . 아닙니다.’ 하는 적당한 말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에 사과를 받아본 게 너무 오랜만이었다. 평균 남성 키보다 작고 왜소한 골격에 타인은 그를 쉽게 보았다. 그가 능력이 좋거나 센스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항상 인간관계에 문제가 많았다. 현재 사회는 물리적인 힘으로 권력관계가 정해지는 사회도 아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차별받지 않는다는 헌법이 있음에도 그것이 실질적으로 가하는 제한이 미미한 것처럼 물리적인 힘은 권력에 영향을 끼쳤다.

 

외모가 곡선적이라서 이상하게 동성 친구들에게 따돌림도 받았다. 외모 때문에 오해받는 것도 지긋지긋했는데, 그의 부인은 그의 작고 곡선적인 분위기에 가산점이 붙은 건지 그를 좋아했다. 여자가 따라다닌다는 생각에 취해 그땐 마냥 기뻤었다. 남자는 사랑에 목마른 사람이었고, 여자는 자기보다 여린 남자를 좋아했으니 서로 완전한 짝이라 확신했다. 그렇게 둘은 연애한 지 1년 만에 결혼에 골인한다.

 

물론 후회했다. 남자는 돌아갈 수만 있다면 부인을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기도 했다. 그의 부인은 동거인으로서 최악이었다. 여타 사람들처럼 그를 만만하게 보았고, 자존심이 강해 그에게 사과를 제대로 한 적도 없었다. 대충 알아달라는 듯이 어물쩍 넘어가거나 가장의 자존심도 안 세워준다면서 반대로 그를 힐난했다.

 

어쨌든, 경찰에 신고하는 것도 두려웠습니다. 경찰에 신고해봤자 신고가 제대로 받아들여질지도 모르는 상황도 두려웠고, 신고 접수가 제대로 된 후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몰라 무서웠습니다.“

자네도 직장을 다녔다 하지 않았나, 자네 부인은 집도 있고 돈도 꽤 있는 걸로 보였는데?“

”...지금 그 얘기를 하려고 했습니다. 이것도 뻔한 얘기라 하실지도 모르겠지만, 부인은 투자에 실패했거든요.“

 

4

제기랄!“

 

여자는 신경질적으로 TV를 껐다. 남자는 또 그 인물이 엮여있겠거니, 하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TV를 남편보다 더 사랑하는 것 같은 여자가 자기 전 TV를 끈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여자는 마치 말을 걸어달라는 듯이 자신이 화가 났음을 숨기지 않았다. 괜히 트집잡히기 싫었던 남자는 입을 열었다.

 

또 무슨 일이야?“

대회 하나 이긴 게 뭐라고 예능까지 나왔어!“

 

요즘 예능은 무슨 저런 놈까지 불러들이는 거야? 여자는 짜증을 냈다. 자기가 좋아하는 예능에 나온 주세운 선수가 아니꼬운 게 분명했다. 남자는 주세운을 감싸기도 뭣하고, 그렇다고 아내의 감정에 두둔하기도 애매해서 잠자코 있었다. 여자는 그런 남자의 반응이 별 상관이 없었는지 핸드폰을 열어 열심히 지인들과 문자를 했다. 텍스트를 치는 속도가 빨랐다. 지인들과 대화를 나눠서 좀 나아진 것인지 몇 분 후 핸드폰을 일부러 큰 소리가 나게 소파에 놓았다.

 

, 안 그래도 볼 게 없는데 이젠 저것도 못 보겠네.“

?“

딱 봐도 이제 슬슬 데려올 애도 없겠다, 그냥 대회 하나 우승했다고 바로 출연시켜 주잖아. 질 낮아졌어.“

 

여자는 툴툴거리며 배를 벅벅 긁었다. 먹을 것으로 기분을 푸려는 심산인지 거실로 슬슬 걸어가더니 과자를 꺼냈다. 부스럭거리며 먹는 모양새가 왜인지 별로라서, 남자는 눈살이 찌푸려졌다. ‘왜 이리 꼴 보기가 싫을까?’ 남자는 무언가 정이 떨어졌다.

 

새삼스레 정이 털릴 것도 없었다. 털렸으면 진작 털렸어야 했다. 그녀는 평소에도 먹으며 부스러기를 떨어뜨리는 건 예삿일이었고, TV를 보며 누군가를 자주 비방했다. 연예인만 나온다고 하면 쟤는 코를 한 것 같다느니, 눈을 찢은 것 같다느니. 그런 말을 듣는 것은 매우 친숙하다시피 한 일이었다. 갑작스레 정이 털려서 이때부터 진짜 이혼을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는 여자가 자신에게 손을 올렸을 때도 여자가 힘들어서 그런 거라고 자기합리화했지만, 자신에게 위협조차 되지 않는 이 비난이 자신을 못 견디게 했다. 그는 이런 여자와 엮이고 싶지 않게 된 것이다.

 

남자는 이혼에 대해 어떻게 말을 꺼낼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여자의 휴대전화에 한 문자가 떴다. ‘근데 너 투자에는 관심 없냐? 나 요즘 이걸로 꿀 빠는 중이라서 그래. 오해하지 마. 관심 없으면 말고.’

 

여자는 다시 핸드폰을 들어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냈다. 남자는 단순히 여자가 좀 가라앉아서 다행이라 여겼다.

 

5

결론부터 말하자면 투자는 폭삭 망했다. 남편의 월급까지 관리하던 여자는 남편의 동의 없이 그 돈을 투자에 사용했다. 남자가 그것을 알게 된 건 이미 돈을 다 잃은 뒤였다. 남자는 처음에 그 사실을 믿지도 못했다. 상사에게 된통 깨져가며 번 돈이다. 자신이 매일매일 출근해서 벌어낸 돈이다. 오전엔 상사의 비위를 맞추고 저녁엔 부인의 비위를 맞춰 살아가며 번 돈이다.

 

남자는 정신이 멍해졌다. 그냥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자신의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경험은 나름 착실하게 살아온 그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평범하게 살아오며 성실함만을 장점으로 가진 그였다. 그런 돈을, 동의 없이 썼다는 데에 남자는 손이 벌벌 떨렸다.

 

시간이 점점 지나자, 눈물이 났다. 그리고 화가 났다. 이 여자는 그를 부속품으로 보는 것이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그를 이렇게 무시할 수 없었다! 남자는 너무 화가 나서 눈물이 났다. 억울하거나 화가 나면 눈물이 나오는 이 버릇이 나약함의 상징 같아 너무 혐오스러웠지만, 지금은 앞에 있는 여자가 더 혐오스러웠다. 지금 여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가 아까 들었던-자신의 돈을 다 날린-이야기보다도 더 남자를 분노하게 했다.

 

지금 그깟 푼돈이 중요한 게 아니야. 걔가 연락이 안 돼, 걔 말만 믿고 지금 돈을 얼마나 빌렸는데.“

 

여자는 손톱을 뜯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핸드폰을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남자는 지금 자신이 들은 게 맞는지 한참을 생각해야 했다. 여자는 기다리기 힘들었는지 휴대전화를 들어 마구 문자를 보냈다. 방 안에는 타자 치는 소리만 들렸다. 뒤이어 남자가 화내는 소리가 겹쳤다.

 

뭐? 푼돈? 그리고 뭐라고? 돈을 빌려? 뭐?

좀 조용히 해봐, 전화 왔어!

 

여자는 미안하다는 소리 하나 없이 전화를 받았다. 꿀릴 게 없다는 태도였다. 남의 돈을 허락 없이 사용한 주제에 고자세였다. 남자는 그깟 전화가 중요한 게 아니라서 여자가 전화하든 말든 소리 질렀다.

 

악! 으악! 이은영! 너 지금! 너! 그게 나한테 할 소리야?!

닥치라고 했지! 너 때문에 안 들리잖아! 저기, , 여보세요. 들려?"

 

은영은 남편을 무시하고 스피커 버튼을 눌렀다. 이젠 남편의 저 목소리보다 크게 들릴 것이라 믿고 그녀는 휴대전화를 귀에 대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은영보다 상대의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안녕, 오랜만이네. 은영아, 나 주세운이야."

 

최악이었다.

 

그 이후는 은영과 세운의 싸움이었다. 싸움이라고 하기도 뭐한, 일방적인 사실 공격이긴 했다. 은영의 투자는 처음에는 순조로웠다. 친구의 말만 믿고 지식 없이 시작한 투자치곤 이익이 쏠쏠했다. 하지만 며칠 뒤 점점 떨어지더니 원금 회수도 못 할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급하게 남편의 돈을 끌어 쓰고, 복싱 선수 시절 친구들에게 돈도 빌렸다. 다시 원금까지 돌려놓았으니, 처음처럼 이익이 날 것이라 기대했다. 이 종목을 투자한 사람들끼리 모인 오픈 카톡에도 모두가 버틴다는 의견이 많았다. 사람들이 전부 버틴다고 하니 은영도 그렇게 했다. 아무것도 보증되지 않는 타인들의 말을 순진하게 따른 것이다.

 

하지만 돈을 몽땅 탕진하고 나니 남는 건 분노뿐이었다. 처음에 이 종목을 알려준 지인에게 매번 협박성 문자를 보냈다. 그 지인은 두려웠던 나머지 은영이 세운과 친한 줄만 알고 세운에게 도와달라고 한 것이다. 그 선택이 훌륭한 선택이긴 했다.

 

은영에게 있어 세운은 더할 나위 없이 증오스럽지만 대항할 수 없는 상대였다. 그녀는 전형적으로 강한 상대에게는 약하고, 약한 상대에게는 강했으므로 정작 세운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은영과 세운은 전 동료였기 때문에 아는 지인들도 겹쳤다. 세운은 은영이 지인들에게 수많은 돈을 빌렸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돈을 갚는 것이 아니라면 연락하지 말라고 상황을 일축했다.

 

그 전화 이후 그녀는 술로 밤을 지새웠다. 그녀는 날 선 짐승처럼 행동했다. 그래서 남자는 차마 분노하거나 짜증을 낼 수 없었다. 이혼하자는 말은 물론 꺼내지도 못했다. 남자는 약자로서 지금 여자에게 저항하면 본인의 안위가 위험해질 것이라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그리고 이런 여자에게 숙여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 불쌍했다.

 

그녀는 술을 마시면 남자에게 화풀이했고, 남자에게 손을 올렸으며, 압도적인 신체적 우위로 그를 두려움에 빠뜨렸다. 남자는 하루하루 자신이 죽어간다고 생각했다. 그는 말라가고 있었다.

 

그래서 최대한 은영이 기분이 괜찮아 보이는 날에 후추 스프레이를 들고 이혼하자는 말을 꺼냈다. 그건 생존하고자 하는 마지막 발악이었다.

 

6

그 뒤는 아까 말한 대로입니다. 부인이 제 목을 졸랐고, 최악까지 예상했던 저는 후추 스프레이를 부인의 얼굴에 뿌렸죠. 부인이 힘이 풀린 사이 주방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절 쫓아온 부인을 칼로, . 죽였습니다. 살기 위해서.“

박복하군. 그래도 살아서 다행이네.“

, 1년 동안 꼼짝없이 감옥신세지만요.“

운이 좋았어, 1년이라니.“
네?

 

남자는 순간 당황했다. 죽이고 싶어서 죽인 것도 아니고, 자신은 철저하게 피해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남자는 1년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

 

운이 좋았다뇨, 전 계획 살인도 아닐뿐더러 아내는 절 계속 때렸습니다. 이건 정당방위라고요!

그래도 사람을 죽이지 않았나? 내가 교도소에 들어오기 전 옆집에 부부가 살았는데, 그쪽 이야기도 자네랑 비슷했어. 남편이 가정 폭력하고 부인이 살기 위해 죽였다던가. 근데 8년을 선고받았더군.“

8년이나요?

고의살인이라고 경찰이 결론 내린 듯하네. 매번 자기에게 폭력을 행사한 남편을 자는 도중 죽였다더군.“

 

남자는 이 노인과 있으면 지루할 틈은 없겠다고 생각했다. 당황했다가 어이없어졌다가, 감정의 변화가 자주 일어났다.

 

, 그건 실수가 아니라 고의가 맞잖습니까! 자는 도중에 죽인 거면요!

왜지? 자네라면 가정 폭력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 텐데. 죽이지 못하면 죽을 것 같은 감정을 잘 알지 않나? 그렇기에 그녀도 살기 위해 죽인 것인데 뭐가 다른가?

 

남자는 숨이 턱 막혔다. 더 이상 노인에게 그 살인이 고의살인이라 주장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고의적인 살인임을 부정하면 자신의 감정 또한 부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살기 위한 살해가 수면 중인 남편을 찌른 여자의 살해와 동일시되는 건 그로서 왜인지 끔찍했다. 그는 되뇌었다. ‘나는 그 여자와 다르다. 나는 정말로 살기 위해서였으니.’

 

남자는 괴로웠다. 생각은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정말 가정폭력범을 살해한 여자는 죄가 있는가?‘. 남자는 같은 피해자로서 생생하게 공감할 수 있었다. 그건, 죄가 아니다. 하지만 그 여자는 명백한 고의적 살인을 저질렀다. 그래서 죄가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고의일지언정 정말 죽을 것 같아서그런 살인을 저지른 거라면?

 

숨이 턱턱 막혔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 괴로울 지경에, 그는 번뜩 부인의 말이 생각났다.

 

그때는 부인과 함께 뉴스를 보고 있었다. 뉴스에서 나오던 건 가정폭력범 남성과 그 남성을 죽인 여성의 흔한 이야기였다. 은영은 웬일로 더럽게 과자를 먹으며 뉴스를 보지 않았다. 차분히 그 뉴스를 다 보더니 헛웃음을 내뱉었을 뿐이다. 그리고 은영이 허탈하게 말했다.

 

가정폭력범을 죽인 여자에 대한 형벌은 너무 강해. 저거 봐, 저 여자도 4년이나 감방에 있어야 하잖아. 만약에 내가 널 가정폭력을 했다 쳐. 아마 네가 나를 죽이면 2년도 안 나올걸.“

 

 

  <제46회 학술문예상 소설 가작 수상소감>

  가작을 수상했다는 문자를 받고 기뻤습니다. 동시에 첫 소설을 어딘가에 내보인다는 건 굉장히 용기가 필요한 일임을 깨달았습니다. 누군가가 제 글을 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부끄러움이 앞서기도 합니다. 과연 누군가에게 읽을 가치가 있는 글일까, 재미는 있을까,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하는 여러 생각도 떠올랐습니다. 글을 쓰는 건 이런 감정과 계속해서 맞서는 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정 폭력에 대한 기사를 접했습니다. 이런 종류의 기사가 무수히 많아 지금은 어떤 기사였는지도 명확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기사를 읽고 난 후 느꼈던 쓸쓸함과 분노가 소설을 쓰게 된 계기입니다. 쓸쓸함보다는 분노가 컸던 것 같습니다. 수상한 후 다시 읽어보니 소설에 분노가 너무 잘 보여서 스스로도 약간 놀랐습니다.

  누군가에게 글을 보여주는 것도 용기가 필요한데, 저는 제 분노까지 보여주게 되었습니다. 이런 용기를 낼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도 않으니, 앞으로는 글에 어떤 감정을 담아야 할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기회가 왔을 때 분노하는 글만 보여드리고 싶지 않고, 기회는 찾아오라고 해서 찾아오지 않으니까요.

  이런 뜻깊은 기회를 주신 덕성여대신문사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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