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 머물다
걷다 머물다
  • 강성진 학우
  • 승인 2007.09.08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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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한 그 곳, 허난설헌 생가에 가다

 

바스락바스락.
앞마당 모래 밟히는 소리가 경쾌하다. 너무도 한적하고 고요해서 귓가엔 내가 움직이는 발자국소리와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소리가 전부다. 참으로 오랜만에 소음을 벗어나니 뭔가 어색한 느낌마저 든다. 그래서 괜히 발자국 소리를 크게 내본다. 고아한 그곳과의 첫 만남은, 이렇듯 정적과 어색함으로 시작되었다.


허난설헌의 생가는 강릉의 조용하고 소박한 초당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 초당의 지명은 그녀의 아버지인 허엽의 호에서 유래했다고 하니, 그 마을 자체에 그녀의 향기가 스며있는 듯했다. 작은 골목으로 조금 들어서야 만날 수 있는 그녀의 생가는 동생인 허균이 함께 태어나고 자란 집이기도 하다. 전통 양식이 잘 보존된 정원이 있는 사랑채가 딸린 ㅁ자형의 기본 구조를 가진 기와집이었다.

 

 

이곳에서 허난설헌은 시집을 가기전인 열다섯 살까지의 짧은 유년시절을 보냈다. 스물일곱 짧은 생을 마친 그녀의, 그나마 행복했을 어린 시절의 집인 것이다. 방탕한 남편, 혹독한 시집살이, 자식들의 죽음, 여성으로서 겪어야 했던 차별과 억압…. 그 모든 것들을 삭혀내며 그녀는 이 집이 얼마나 그리워했을까.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묘한 긴장감과, 딱 그만큼의 편안함이 전해져왔다. 크게 둘러볼 것도 없이 소박한 집인데, 그 자체는 너무도 위엄이 서려있었다. 조심조심 그 안을 걸어보았다. 내가 가지고 있던 허난설헌의 여러 이미지가 동선을 따라 움직였다. 그저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두근두근 거렸다.


울울한 소나무 숲을 배경삼아 자리하고 있는 허난설헌의 생가는 정적인 느낌이었다. 무게를 잡아주는 듯 깊고 짙은 푸른색의 기와는 옅은 흙벽과 조화를 이루며 고즈넉한 분위기를 한껏 자아낸다. 화려하거나 특별하지는 않았지만, 참으로 ‘그녀다운’ 집이었다.

 

 왠지 우울한 느낌이 감도는 듯, 곳곳에 피어있는 색색의 꽃들도 조금은 아련하고 무거워 보였던 건 나의 착각이었을까. 그녀의 공간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 없었다. 우아한 능소화도 빽빽한 소나무도 작은 바람도 햇살도 꼭 그곳만을 위해 존재하는 듯했다.


기와에 쌓인 마른 꽃잎을 손으로 살짝 스쳐보며 돌아나오는 동안, 내가 이곳을 구성하는 하나의 색으로 존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멈춘 듯, 꿈속을 거닐다 나온 기분이랄까.  정신없는 도시의 생활을 하다보면 문득 떠오를 것 같은 허난설헌의 생가. 예정보다 훌쩍 넘긴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며, 내 자신에게 참 좋은 발걸음을 선물한 것 같아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괜히 서글프기도 했지만 그렇게 맘이 편해보기도 처음이었던 그날, 허난설헌 그녀의 생가엔 허난설헌의 삶도 나의 삶도 이 여름도, 조용히 머물고 있었다.

강선진(미술사학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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