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 그 공간의 정치경제학
백화점, 그 공간의 정치경제학
  • 전현경
  • 승인 2003.09.27 16: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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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의 미로에서 길을 잃다

 

 

 

 

 

 

 

 

 

 

 

 

 

 

 

어느날 백화점에서 길을 잃다.
 바람 냄새가 차가와지는 어느 날, 서늘한 기운 탓인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밀려온다. 하나하나 꼽을 수는 없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는 것 같다. 불안한 눈빛은 추스르려 무언가 믿을만한 것은 없었는지 생각을 굴려보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 정처 없는 발걸음을 숨기려 백화점에 들어간다. 나와는 달리 확신에 찬 발걸음들이 오간다. 따뜻한 공기, 기분 좋은 냄새, 뭔가 반짝반짝하는 것들... ‘어? 저거 나한테 어울리겠는데? 얼마지?’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나도 다른 이들과 같은 발소리를 갖게 된다. 짧지만 다정한 말을 나눌 수 있는 점원들, 둘러볼수록 눈빛은 확신을 갖게 된다. 무엇을 살 것인가 이것은 어떻고 또 저것은 어떠한가....내가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어울리는 옷과 일상을 아름답게 할 수 있는 몇 가지 물건들을 사고 나면 들어올 때와는 다른 내가 되어 있을 것이다. 게다가 미로와 같은 백화점의 구조는 곧잘 길을 잃게 만든다. 기꺼이 길을 잃고 다시 한바퀴를 둘러본다. 바쁘면? 어느 점원이라도 붙들고 ‘나가는 길이 어디죠?’라고 물어보면 되니까.

소비사회의 광장 ‘백화점’
 우리는 명실 공히 ‘소비’의 시대를 살고 있다. 어떤 일을 하는가 보다는 어떻게 소비하는가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대변해준다. 그가 입은 옷과 신발의 브랜드, 식사하는 장소와 메뉴, 가전제품과 일상적 소품들까지 그가 가진 취향과 구매력이 곧 그 사람이 되는 시대이다. 이 시대에서 쇼핑은 더 이상 무의미한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을 만들어가는 가장 ‘문화적’인 활동이 된다. 이 소비사회의 열린 광장인 ‘백화점’에서는 모든 이들이 소비자의 권리를 갖고 소비하는 자로서 존중받는다. 따라서 백화점에 자주 가는 것이 하나도 이상할 것은 없는 듯 보인다. 이제는 삶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서 ‘판매’되고 있으므로.

감미로움의 정체
 그렇다면 백화점 ‘밖’의 삶은 어떠한가? ‘소비’가 중요한 타이틀이 되었을 망정 삶의 모든 문제를 대체하고 해결해 주지는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누구도 평생직장을 보장받을 수 없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서 여성이 설 자리는 더욱 불안해지는 듯 하다. 전문직에 진입하는 여성이 늘어나고 있다고는 하나 여전히 10%도 되지 않고, 여성의 평균임금은 남성의 절반에 불과하다. 대학을 졸업한다고, 토익 만점을 받는다고 해서 보장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미 한국의 여성들은 ‘섹스&시티’나 ‘앨리의 사랑 만들기’, ‘프랜즈’에 시선이 있다. 그러나 자아를 훼손하지 않는 일과 전통적 가족제도로부터 벗어난 개인의 삶을 향하는 여성들에게 현실은 너무나 오래되었고 척박할 따름이다. 원하는 삶의 단편은 백화점 상품 속 이미지로서만 찾을 수 있을 뿐이다. 여성들의 감수성을 존중하고 충실히 따르는 유일한 공간인 상품의 세계, 만약 이 곳의 유혹이 그 삶의 고단함으로 인한 것이라면 그 감미로움은 불길하다. 다시는 백화점에서 나오는 길을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사회의 문제
 한 동안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쇼핑 중독증’에서 사람들은 손쉽게 물건을 살 수 있게 하는 신용카드, 홈쇼핑 등이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전에 주목을 받았던 ‘게임 중독증’은 컴퓨터 게임에 원인을 돌려왔던 것처럼... 그러나 그 문제로 고생하는 사람들의 사연을 보면 그 개인이 삶에서 느끼는 소외감이 그 원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같은 맥락에서 젊은 여성들의 소비를 단순히 ‘할일 없는’, 혹은 ‘생각 없는’ 여자들의 유희로 치부하여 사회 문제 시할 일은  더더욱 아니다. 젊은 여성들은 할 일을 주지 않는 사회로 인해 소외를 경험하고 있을 뿐 아니라 상품을 통해 스스로를 구현하라는 사회의 문법을 반영하고 있을 따름이다. 사회의 문제는 바로 이곳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백화점에서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의 삶을 불안하게 만들고 또 그 불안함을 보상받을 수 있는 공간까지 제공해 주는 것. 자아와 현실적 제도의 간극이 주는 공백을 상품을 통해 메울  수 밖에 없는 것. 과연 다른 길은 없는 것일까? 현실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진정한 현실이라 하더라도, 그 간극 만큼은 다른 의미들로 채울 수 있지 않을까? 삶이 조금 더 불안해진다고 느끼게 되더라도 주변을 둘러보고,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패션 카탈로그에나 나오는 만들어진 장면들이 아닌 다양한 가치들이 살아있는 현장들 말이다.

전현경
인터넷 여성주의 커뮤니티 언니네 운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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