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럿피쉬]‘옛날 옛적’으로 시작하는 할머니의 이야기처럼
[파일럿피쉬]‘옛날 옛적’으로 시작하는 할머니의 이야기처럼
  • 김민지 기자
  • 승인 2008.03.03 14: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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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인드터치

 

‘파일럿피쉬’는 주인공 물고기가 들어가기 전 어항 속이 어떤 환경인지 알아보고, 환경을 개선해주는 물고기입니다. 본 코너를 통해 학우여러분께 더 좋은 공연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의 공연길잡이 물고기 ‘파일럿피쉬’가 되겠습니다. <편집자 주>

 

 

‘옛날 옛적’으로 시작하는 할머니의 이야기처럼


새색시처럼 잔걸음을 걷는 나이든 여자와, 어깨가 구부정하니 웅크려든 나이든 남자가 방으로 들어선다. 여자의 조심스러운 발걸음만큼 짧고 조심스런 남자의 말. 마치 어떤 대화를 나눈다기보다 단어를 이어 맞춘 문장을 툭툭 던지는 것 같아 그들의 대화는 듣는 사람에게도 어색하기만하다. 하지만 연극 시작 10분, 28년 만에 마셔본 맥주, 수감생활, 국가권력 등 몇몇 뼈있는 단어 앞에 사람들은 서툰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 남자의 사정

 

이 남자는 ‘블라인드터캄라는 2인조 그룹의 맴버였다. ‘일-미 양국 정부의 오키나와 반환협정 반대시위’에 참가한 남자는 동료 우에노와 함께 시위 주동자로 몰려 28년 간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오십이 다 된 나이에 교도소에서 나오게 된다.

 

세상은 변했다. 스위치가 없어 스스로 눈을 감지 않고는 어둠도 가질 수 없었던 남자에겐 불을 끌 자유가 주어졌다. 집에 돌아온 남자는 감격적인 목소리로 “이 순간 나는 진짜 자유야. 몸이 가벼워. 나의 세상이 넓어졌어”라며 소리친다. 하지만 그 목소리만큼 그의 일상은 자유롭거나 적극적이지 못하다. 남자는 집 마당에 작은 헛간을 만든다. 네 면이 모두 벽으로 이루어진 시계조차 없는 방, 그 방에선 판자를 얹은 싱크대가 책상이고 변기가 의자의 역할을 대신한다. 28년이라는 세월이 그를 그 곳에 더 익숙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그의 28년을 앗아간 그의 죄는 진실일까, 물론 아니다. “그 당시에는 어떤 사람의 거짓증언에 선봉대가 되어버렸던 내가 새로운 사실도 없고, 새로 조사를 한 것도 아닌데 28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선봉대가 아니게 됐어.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고!” 동료인 우에노가 같이 나오지 못한 것에 슬퍼하는 그의 말 속에 얽힌 사회는 모순 덩어리일 뿐이다.


 

그 여자의 사정

 

여자는 남자와 옥중 결혼을 해 16년을 기다렸다.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줄 수 있는  그녀에게 남편은 운동권의 주역이다. 그녀는 그가 교도소에 있을 때 보냈던 멜로디카드를 꺼내든다. 멜로디카드에서는 ‘러브미텐더’가 흘러나온다. 그리고 무대 한 쪽에 하얀 천으로 덮혀있던 피아노가 그녀의 손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그녀의 손끝에서 울리는 ‘러브미텐더’의 간결한 멜로디. 그녀는 그가 다시 피아노를 치길 바란다. 

 

하지만 그와의 대화는 깊어질수록 잦은 싸움만 부를 뿐이다. 특히 피아노를 쳐달라는 이야기만 꺼내면 그는 더욱 화를 내며 반응한다. 결국 그에게 화가 난 그녀가 “결혼은 정기적인 교도소 방문을 위한 허울이었어. 당신이 풀려나면 내 목표는 달성한 것이니, 그렇게 끝내자 생각했다고”라고 말하자 남자는 크게 화를 내며 헛간(독방)으로 들어간다. 서로에게 성을 내던 그들은 곧 노골적인 이야기, 비밀이야기도 서슴치 않고 하게 된다.

 

그리고 알게 된 사실 “블라인드 터치는 눈을 감은 채 피아노를 치는거야. 사람들 사이에서 분위기를 띄우는 것. 엉망으로 치더라도 선동구호만 외치면 사람들은 환호성을 보냈지, 나는 그 역할을 맡았을 뿐이야. 나는 사실 악보를 볼 줄 몰라” 그녀에게 남편은 더 이상 운동권 앞에 선 강한 남자가 아니다. 그저 사회 앞에 상처 입은 남편일 뿐이다.


 

연출자 김광보씨는 연극 <블라인드터치>에 대해 “본질에 가장 충실하게 연결되는 정석연극이다. 지금 세대에게는 조금 어렵고 무거울 수도 있지만 사회구조의 모순과 국가 권력에 희생되어온 사람들의 모습을, 좋은 배우들과 함께 연극으로나마 보여주고 싶었다. 이 이야기는 이면에 정치적인 부분이 깔려있지만 결과적으로 블라인드터치까지의 과정에서 보이는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을 그렸다”고 말한다.

처음 이 연극과 맞닥뜨렸을 땐 어색할 수도 있지만 곧 연극 속 배우에게, 곧 그 인물에게 집중하게 된다. 연극이 진행되는 시간, 1시간 35분.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조심스레 배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기엔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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