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①]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①]
  • 한상권(사학) 교수
  • 승인 2008.03.04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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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리사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차미리사

창학 88주년을 맞는 2008년. 우리대학의 뿌리인 차미리사 선생의 건학이념과 숭고한 교육 정신을 다시금 돌아볼 때이다. 본지는 차미리사 선생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며 동시에 대학의 기본정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① 김미리사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차미리사
② 쓰개치마를 벗어버리고 더 넓은 세상으로
③ 조국을 위해 피를 흘리자
④ 일천만 조선 여성이여 오라, 다 내게로 오라
⑤ 조선 방방곡곡을 누비는 만 리 대장정을 떠나다
⑥ 조선 사람의 뜨거운 사랑과 땀과 피의 결정, 근화
⑦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1. 3·1독립정신을 계승한 조선여자교육회
  독립운동가이며 여성교육운동가인 덕성학원 설립자 차미리사(車美理士: 1879-1955)는 1920년 3·1독립정신을 이어받아 조선여자교육회를 창립하였다. 조선여자교육회는 1920년대 여성교육운동을 이끈 중심단체였다. 조선여자교육회 활동에 대해 고등학교『국사』교과서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3·1운동을 비롯한 국내외 항일 독립 운동에서 여성들의 목숨을 건 참여와 희생의 경험은 이들의 정치적 사회적 의식을 획기적으로 계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민족 실력 양성 운동에서 사회 개조와 신문화 건설에 여성들의 역할이 요구되자, 이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이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여성의 계몽과 교육이 무엇보다 선결 조건임을 작가하였다. 그리하여 문맹퇴치 구습 타파 생활 개선의 실현을 위한 여성 교육 계몽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1920년대 초 전국적으로 여장 청년회 부인회 등 수많은 여성 잔체가 결성되어 활동을 시작하였다. 여성 계몽 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중심 단체로는 조선여자교육회 조선여자청년회가 있었으며 종교계통으로는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가 대표적이었다.(교육부,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하), 1999)

  『국사』교과서는 조선여자교육회를 창립한 김미리사 즉 차미리사의 활동에 대해서도 서술하였다.

조선여자교육회는 1920년 4월 배화여학교 사감인 김미리사를 중심으로 창립되었다. 조선여자교육회는 창립 직후 여자야학교를 설립하여 조선어와 산술 등을 가르치고 여러 차례 토론회와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여성 계몽에 힘으로 쏟았다. 1921년 여름에는 3개월여에 걸쳐 전국 60여 곳을 순회하는 대대적인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강연의 주요 주제는 조선여자교육회의 취지에 대한 설명과 함께, 여성 교육과 사회활동의 중요성, 남녀평등, 생활습관의 개선 등이었다.(금성출판사, 고등학교 『한국 근·현대사』, 235쪽, 2002)

2. ‘섭섭이’에서 ‘미리사’로
  차미리사의 어릴 적 이름은 ‘섭섭이’였다. 아들을 바라는 집에서 딸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섭섭이는 열일곱이 되던 해에 무교동에 사는 김진옥(金振玉)에게 출가하였다. 하지만 신혼의 행복도 잠깐, 남편은 결혼한 지 삼 년이 채 못 되어 중병에 걸려 앓아누웠다. 남편은 유일한 혈육인 딸 하나만 남겨둔 채 그만 눈을 감았다. 섭섭이의 나이 열아홉 되던 해였다. 친정으로 돌아온 섭섭이는 어머니와 함께 스크랜튼(William B. Scranton)이 세운 상동교회에 출입하면서 개신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 또한 하느님을 통하여 남성과 평등한 인격체로서의 자아를 발견하게 되었다. 섭섭이는 상동교회에서 스크랜튼 선교사로부터 ‘미리사(Mellisa)’란 세례명을 받았다. ‘섭섭이’에서 ‘미리사’가 된 것이다. 미리사는 부부가 별성(別姓)이었던 조선의 관습을 부정하고 서구식으로 남편 김씨의 성을 따랐는데, 그 까닭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나는 약자인 여자로 태어나온 까닭에 소위 여필종부라는 옛 습관에 의지하여 나의 본성을 떼어버리고 남편인 김씨의 성을 따라서부터 김씨가 된 것이다.(조선 습관에는 여자가 반드시 남편의 성을 따르는 것이 아니나 서양이나 일본에는 여자가 대개는 남편의 성을 따르는데 나도 예수교회에 들어갈 때에 교회 습관에 의지하여 성명을 그와 같이 지었다.)(金美理士,〈春風秋雨 五十年間에서 多淚多恨한 나의 歷史〉,《別乾坤》1928년 1월)

3. ‘김미리사’에서 ‘차미리사’로 

   
▲ 차미리사 여사
김미리사가 “나의 본성은 뚜렷한 연안 차씨” 라고 처음 공개적으로 밝힌 것은 50세가 되는 해인 1928년이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다시 차씨로 행세하기는 도리어 새삼스러운 일 같아서 아직 그대로 행세를 한다”며, 이후로도 계속 김미리사로 사회활동을 해왔다. 그러다 가 1936년 근화여자실업학교 1회 졸업장에 ‘차미리사’라는 이름으로 서명함으로써, 비로소 김미리사에서 차미리사로 복귀하였다. 여성 자립에 기초가 되는 실업교육을 본격적으로 실시하면서 자신도 남편성과 이별하고 본래의 성으로 복귀한 것이다. 자신의 본성을 되찾은 차미리사는 졸업생들에게 “여러분은 결혼준비하기 위해서나 생활이 군색함으로써 부득이 직업을 가지는 이가 되지 말고, 내 생활은 내 손으로 개척해나간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사회와 싸우는 동시에 사회를 알고 자기를 알도록 노력하십시오.”라고 하여, 조선여성의 자립을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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