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②]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②]
  • 정무정(미술사)교수
  • 승인 2008.03.17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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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개치마를 벗어버리고 더 넓은 세상으로

창학 88주년을 맞는 2008년. 우리대학의 뿌리인 차미리사 선생의 건학이념과 숭고한 교육 정신을 다시금 돌아볼 때이다. 차미리사연구소와 공동으로 차미리사 선생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며 동시에 대학의 기본정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자 본 코너를 연재 한다. <편집자 주>

황금의 나라, 자유의 나라 미국으로
차미리사는 상동교회에 다니면서 조선 여성의 비참한 처지에 눈을 떴다. 조국의 운명과 조선 여성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차미리사는 1901년 5월 인천에서 상해로 향하는 한성호에 몸을 실었다. 차미리사는 배에 오르기 전 그동안 늘 쓰고 다니던 쓰개치마를 벗었다. 조선의 여성이 감내해야 했던 멍에를 스스로 벗어내는 몸짓이기도 했다.

뇌막염으로 인해 청각 장애까지 얻은 고통 속에서도 무사히 중국유학생활을 마친 차미리사는 곧바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차미리사는 미국 중부의 미주리주에 있는 스캐리트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교육 운동, 사회봉사활동, 국권 회복운동, 언론운동 등에 전념하였다. 당시 캘리포니아에서는 국권이 상실되는 위기에 직면하여 힘을 합해 나라를 구하는 활동을 하자는 취지로 대동교육회가 창립되었는데, 그 자리에는 “상해에서 방금 건너 온 김미리사 부인” 즉 차미리사도 함께 하였다. 차미리사의 대동교육회에의 참여는 그의 생애에서 첫 민족주의 운동이요 국권 회복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대동교육회에의 참여는 향후 그가 민족 교육 운동에 매진할 수 있는 단초가 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재미 한인사회의 첫 사회복지가(social worker)
차미리사는 1907년부터 하와이에서 본토로 건너오는 한인 노동자들을 위해 숙소, 직업알선, 전도 활동 등의 사회봉사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1910년까지 초창기 재미 한인사회를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였다. 여성으로서 첫 재미 한인 사회 활동가가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차미리사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일이 힘들어 노임이 2~3배가 되는 캘리포니아로 무작정 마구 건너오는 이주 한인들에게 직업을 알선하고 숙소를 마련해주고, 한국부인들에게 미국 가정의 부엌일과 집 청소하는 것 등을 가르쳤다. 타국 땅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한국부인들을 파출부로 취직시키고, 아이들을 위해 탁아소를 경영하며 한국어, 영어, 성경을 가르쳤다. 남자들이 하지 못하는 여자들만이 할 수 있는 꼭 필요한 일을 맡아서 해결해 주었던 것이다.

당시 차미리사가 함께 일한 미국 선교사들은 감리교 여전도회 소속으로 사회복음주의의 입장에서 자선, 구제, 교육, 헌금 등을 강조하고, 인류평등주의(egalitarianism)의 입장에서 남녀 차별을 반대하였다. 또한 여성들이 자기의 노력으로 운명을 개척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한 사람이 한 가지 기술을 익히는 ‘일인일기(一人一技) 교육’을 강조하였다. 훗날 차미리사가 사회 전체가 제도적으로 구원받는 복지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 하에 사회 활동, 교육 활동을 벌이게 된 데에는 일찍이 상동교회에서의 감화와 이후 미국 유학시절 받은 사회복음주의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였다. “여성의 권리를 확장함에는 여성의 경제적 능력이 필요하며, 그 능력을 얻기 위해서는 실제적, 전문적 기술이 필요하다”며 일인일기 교육을 위해 근화여학교 내에 양복과, 사진과 등을 조선 최초로 설치한 것도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1908년 차미리사는 “도덕을 숭상하며 자선 사업에 힘써 여성 사회를 활성화 할 것”을 목적으로 재미 한인 첫 여성단체인 한국부인회를 창립하고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본국과 연계되는 민족적 애국사업으로서 평안북도 선천에 대동고아원(大同孤兒院)을 설립하는 운동에도 깊숙이 관여하였다. 차미리사는 이러한 사회 활동을 통해 조선 여성도 노력과 열성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그가 귀국 후 여성 교육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이러한 믿음의 실천이었다.   

*이 글은 사학과 한상권 교수의 저서 『차미리사 평전-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2008년 6월 간행예정)중 2장을 발췌·요약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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