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미리사 칼럼] 조선 사람의 뜨거운 사랑과 땀과 피의 결정, 근화
[차미리사 칼럼] 조선 사람의 뜨거운 사랑과 땀과 피의 결정, 근화
  • 정해영(화학) 교수
  • 승인 2008.05.19 15: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21년 한 해를 전국 예순 일곱 고을, 만리 대장정으로 보낸 탓으로 이제 ‘김미리사’ ‘김부인’ 하면 조선팔도에 그 성명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차미리사는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조선여자교육협회가 전국순회강연을 통해 모은 돈으로 세운 근화학원은 이천만 조선민족의 주머니 속에서 푼돈을 모아 설립한 순 조선적인 교육기관이었다. 차미리사는 근화학원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피와 땀으로 건립한 자랑스러운 교육기관이라고 자부하였다.

 

 

1923년 차미리사는 근화학원 주간부에 200명, 야간부에 100명을 모집하여 300명의 학생을 수용할 수 있는 학교건물과 학생들이 머물 수 있는 기숙사를 짓는 일이 시급해졌다. 왕실에서 창덕궁 금호문 앞에 있는 빈터 260여 평을 기부하였으며 토목부에서 건축 허가도 났다. 문제는 공사비였다. 1923년 11월 조선여자교육협회는 건축 기금 마련을 위해 남조선지방순회연극단(순회연극단)을 조직하여 지방 순회공연을 떠났다. 순회연극단이 가는 곳마다 남녀관중이 운집하여 장내는 입추의 여지가 없는 공전의 대성황을 이루었다. 순회연극단은 12월 25일 영동에서 마지막 공연을 할 때까지 사십여 일 동안 충청, 전라, 경상 등 조선 남부 23고을에서 순회공연을 하여 5천 여원의 기부금을 모금하는 등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뿐만 아니라 순회연극공연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널리 알리고 민중을 계몽하는 효과도 거두었다.

 

 

그러나 당초 목표로 했던 모금액 10만 원에는 크게 못미처 교사신축과 기숙사건축은 착수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시기에 사회주의세력이 성장하면서 민족주의 계열의 실력양성운동에 대한 비판적인 흐름이 일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각 지방의 부호들이 친일화 하는 경향을 보여, 다소 민족적 색채를 띠고 있던 지방 유지들이 민족교육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3.1운동을 계기로 분출되었던 여성교육에 대한 사회적 열기가 완전히 식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소설 상록수의 작가로 유명한 심훈(본명 심대섭(沈大燮))의 맏형인 심우섭(沈友燮)의 도움에 힘입어 근화학원은 1924년 12월 20일 안국동 37번지(현 덕성여고 자리)에 있는 낙천사(樂天舍)라는 180칸의 큰집으로 이전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심우섭의 친구인 통영 해동의원 원장 김상용(29)이 만원을 특별 기부하였다. 민족주의계열의 교육 운동은 개량주의 노선이라 하여 전반적으로 외면당하는 사회 분위기 하에서 이와 같은 독지가가 나타난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평소에도 “죽는 순간까지 나는 무엇이고 사회에 유익한 일을 하겠다.”고 다짐해 왔다. 그러나 수중에 가진 재산이 없고 또 사회가 전반적으로 궁핍하여 학교를 이끌어 가는데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독지가로부터 뜻밖의 도움을 받고 보니 새롭게 각오를 다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가정도 없고 아무런 일가친척도 없다. 하나 두었던 딸은 어디에 있는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조차 알 수 없다. 그러니 이 근화는 내 가정이고 이곳의 학생들은 모두 내 딸들이다. 내 한 몸을 오로지 이 학교와 학생들에게 바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도록 하자.”

 

 

차미리사는 죽는 날까지 조선의 딸들을 위하는 섬김의 삶을 살겠다고 굳게 다짐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934년 2월 8일, 그동안 모은 차미리사의 사유 재산과 학교 재산, 사회유지의 원조로 10만 원의 거금을 모아 근화여학교를 재단법인 근화실업학원(槿花實業學園)으로 인가받았다. 그의 나이 56세 되던 해의 일이었다. 재단법인 근화실업학원의 임원에는 이사장 차미리사를 비롯하여 이인, 독고선, 김용규, 장병량 등이 이사로 취임했다. 민족주의계를 대표하는 인사들이 재단법인 설립에 참여한 것은 학교를 자력으로 설립 운영하려는 차미리사의 고투를 지지 후원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1938년 10월 14일 근화여자실업학교는 총독부의 압력으로 덕성여자실업학교(德成女子實業學校)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 이 글은 사학과 한상권 교수의 저서 『차미리사 평전-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2008년 6월 간행예정) 중 4장을 발췌.요약한 것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도봉구 삼양로144길 33 덕성여자대학교 도서관 402호 덕성여대신문사
  • 대표전화 : 02-901-8551, 8558
  • 청소년보호책임자 : 고유미
  • 법인명 : 덕성여자대학교
  • 제호 : 덕성여대신문
  • 발행인 : 김건희
  • 주간 : 조연성
  • 편집인 : 고유미
  • 메일 : press@duksung.ac.kr
  • 덕성여대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덕성여대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ress@duksung.ac.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