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마지막 편지, 유서> 가시는 발걸음 가벼우소서.
<인생의 마지막 편지, 유서> 가시는 발걸음 가벼우소서.
  • 덕성여대신문사
  • 승인 2010.03.13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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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부턴가 ‘웰빙(Well-being)’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생활 모든 것에 ‘웰빙’이라는 단어가 붙었다. 웰빙 음료수, 웰빙 아파트, 웰빙 운동 등 대중들의 관심은 ‘잘 살기 위한’ 웰빙으로 쏠렸다. 그런데 최근에는 잘 살고 잘 먹기의 웰빙을 넘어, 품위있고 자연스럽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웰다잉(Well-dying)’에 사람들이 눈을 돌리고 있다. 특히 작년에 대법원의 존엄사 확정판결이 이뤄지고, 故김수환 추기경과 故법정스님, 故장영희 서강대 교수, 故노무현 전 대통령 등 저명인사들의 죽음으로 이른바 웰다잉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특히 지난 11일 입적한 법정스님의 미리 쓴 유서가 화제가 되고 있고, 종교인이나 철학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웰다잉(Well dying)은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넘어 ‘아름답고 편안한 죽음을 준비할 권리’로 인식되고 있다.
 죽음은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통과의례이다. 웰다잉은 죽음이 무섭고 두렵다고 생각하지 않고 죽음이 가깝지 않을 때부터 차근차근 준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자신이 살아온 삶의 회고를 통해, 다가올 죽음에 있어 자신의 뜻을 반영하고, 품위 있는 죽음을 맞기 위한 마음다짐이다. 지금 우리, 아름다운 삶을 향한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나를 성찰하며, 편히 갈 수 있는 경로를 미리 설정해보면 어떨까?

열정과 냉정 사이에서
 젊음이 가득한 삶을 살줄로만 생각했던 적이 있었던가. 한낱 철부지 어린아이 같던 나의 청춘은 어느새 이따금씩 떠올리게 되는 추억이 되었다. 파릇한 젊음이 금세 지나가 버리는 것만 같아 아쉬워했고, 불꽃같은 열정이 롤러코스터처럼 순식간에 굴러가 버릴까 아쉬워했다. 의욕이 넘치되 천방지축이 되기는 싫었고, 당당함은 가득하지만 오만해지기 싫었으며, 반짝반짝 빛나지만 유난스러운 것은 싫었다.
 이따금 생각에 잠길 때면, 마치 마라톤을 완주하는 마라토너처럼 오기와 열정으로 무장한 채 살아온 나의 인생이 파노라마가 되어 머리를 스친다. 한 번 좋아한 것은 반드시 나와 내 인생의 일부로 삼아 평생을 사랑하고 아끼는 고집쟁이였던 터라, 나의 청춘은 아무리 쏟아내도 한 데 모이는 액체 수은처럼 한 곳을 향해 달렸다. 어찌 보면 나는 지독한 청춘예찬론자였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이들과는 달리, 뼈 속까지 배이지 않는 천성은 참 여러 번 쉽게도 변했다. 당시에는 미처 알지 못했지만, 백사장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에야 나는 그것이 나의 천성이었다는 것을 안다.
어느덧 미래를 기다리는 것 보다 과거를 회상하는 시간이 많아진 내게, 미래는 또 다시 설렘이 되어 다가온다. 평생을 의욕과 열정으로 지내온 내게, 조용하고 깔끔한 주택에 홀로 앉아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애꿎은 마룻바닥을 손으로 쓸고 또 쓸어내리며 인생의 마지막을 기다리는, 그런 할망구 같은 엔딩은 어울리지 않고말고.
 언제나 내게 인생의 달콤한 묘미를 알려준 열정이란 놈이 이제는 조용히 내 마음을 다독인다. 한 곳으로 뭉치고 또 뭉치는 수은 알갱이가 금세 증발해 흔적을 남기지 않듯이 그렇게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을 향해 가까워가기를 기도해 본다. -박연경 기자

“아침을 보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학창시절, 유독 아침잠이 많았던 나는 부모님이 아침에 깨울 때면 항상 눈살을 찌푸렸고, 벌써 해가 떠서 아침이 됐다는 사실이 너무나 싫었다. 창문가의 침대에 걸터앉아 서서히 잠에서 깨어날 쯤, 아침햇살은 꼭 내 얼굴에 드리웠고 아무리 치워내려고 손사래를 쳐봐도 꿈쩍할 리 없는 의연한 모습에 말도 안 돼는 심통만 가득해졌다. 이런 내 모습에 어머니는 “눈을 떴을 때 햇빛을 볼 수 있고, 신체의 평온함을 느꼈을 때의 감사함을 왜 모르냐”며 나를 타이르셨다. 채 20년도 살지 않은, 정말 어렸던 나는 몰랐다. 어머니께서 아침에 혼자 조용히 읊조리시던 “아침을 보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를.
 그 당시의 몇 배의 인생을 살아온 나에게 어머니의 한마디는 절대적 공감체이며, 지금도 바쁜 하루하루에 아침햇살을 받기조차도 거부하는 젊은이들에게 가장 먼저 해주고 싶은 조언이다. 다시 하루, 다시 시작하는 또 다른 삶의 소중한 가치를 깨닫고 마음가짐을 길러야 하는 것이 인생의 선배로써 해주고 싶은 말이다.
이 글을 쓰는 이 순간, 내가 유일하게 기대고 있는 것은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이다. 생각은 머리로 하고, 글은 손으로 쓰지만, 들려오는 소리의 근원지는 자신의 마음이다. 나는 이를 반 평생을 살아온 후에야 깨달았지만 이 글을 보는 누군가는 생각하기 전에, 손으로 실행에 옮기기 전에, 마음이 들려주는 말을 들어라. 이 말을 듣고 나 자신을 믿고 따를 때, 먼 길을 앞에 두고도 초연할 수 있다. -이경라 기자

내세가 뭐있나, 지금을 살다 가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쉽게 살자’를 인생의 목표로 살아왔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크게 성공하지 못하고 떠나는 것 같아 나 자신에게 짜증이 난다. 인생의 큰 전환점 없이 그저 흘러가는 대로 자라고 늙었으니. 하지만 골머리 쓰지 않고 살아왔으니 사는 동안의 목표는 다 이루고 가는 것 아닌가. 가볍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떠날 수 있으니 난 죽는 순간에도 삶의 목표를 이뤄 낸 진정 성공한 사람이다.
 고향에서는 망자를 위해 제사를 거하게 치른다. 죽은 자를 위해 살아있는 문중 여자들이 며칠을 고생하는데 허례허식이라는 생각을 해왔다. 차라리 내가 살아있는 동안 좋아했던 배달음식을 시켜놓고 조문객끼리 나눠먹으며 나와 있었던 좋았던 일, 기분 나빴던 일 두런두런 이야기 하며 나를 조금씩 잊어가는 모임을 가지면 좋겠다. 부의금은 받지 말고 내가 모아 둔 돈은 장례비용 빼고 아낌없이 모두 조문객들 음식 값으로 쓰길 바란다. ‘사는 동안 짠순이었던 장지원, 가는 길도 짠순이’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으니까.
마지막으로 장지는 사지 말고 서울에서 멀지 않은 납골당에 안치해주길 바란다. 사는 동안 본인 명의로 된 집이 없는 사람이 대다수인데 죽어서 내 명의의 집이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기일이라고 억지로 차 밀리는데 꾸역꾸역 오지 말고 살다 문득 생각이 나면 살짝 들러 볼 수 있을 정도 거리에만 나를 두었으면 좋겠다.
 다시 태어난다면 무엇으로 태어나겠고 깊이 생각하지 말고 살아라. 지금 당장을 살기도 바쁠 테니 내세까지 계산하지 말고 순간순간을 살다 좋은 곳에서 만날 수 있길 바란다. -장지원 기자

눈을 감듯이 자연스레 다가올.
 앞으로 하염없이 걷다 잠시앉아 뒤를 돌아보니, 어느 덧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들보다 아랫 전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시간가는 것이 화살촉만큼 빠르다더니 이제야 그 말이 피부로 느껴지는 듯하다. 지금보다 좀 더 충만한 자유가 주어지던 시절에는 내 앞에 펼쳐질 날들이 깨알처럼 수두룩하리라 생각했지만 되돌아보면 그건 젊음 특유의 무모함들이 빚어낸 치기였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나는 꽤 여유로운 삶을 지향하는 사람이다. 어릴 적부터 워낙 몸에 편안하고 안락한 것을 좋아하는 성정 탓인지, 싫증을 잘 내던 탓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치열하게 사는 것을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그런 내 성격이 너무 꿈 가운데서 사는 사람처럼 느껴지셨을런지 모르지만 내가 좋으면 되는 것이지.
 물론 그러려니 하며 젊음을 방만하게 소비한 탓에 어찌 보면 시간을 좀 더 소중히 다루지 못하고 물 흐르듯 두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또 어떤가. 내가 애착을 가지던 것들 사이에서 안온하게 삶을 살아온다는 건 쉽사리 얻기 힘든 행복일 것이다. 조용한 새벽에 잠자리에 누워 듣던 음악의 충만함이나 한잔의 향기로운 차로 다스려지던 마음. 책속에서만 찾을 수 있는 세계를 내 손에서 풀어낼 때의 기쁨은 말로 다 하기 힘들다.
 사전적 정의 속에서나 느껴지던 죽음이 목전에 놓일 때, 과연 내가 얼마만큼의 여유를 가지고 맞닥뜨릴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물이 휴지에 스며들듯 생을 지나보낼 수 있다면 한바탕 잘 살다 가는 것이 아닐까. 나는 아직까지도 또 다른 한량의 삶과 죽음을 꿈꾸고 있다.   -이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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