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싸움은 아니기를
외로운 싸움은 아니기를
  • 백혜진(경영 78) 동문
  • 승인 2011.04.09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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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1978년에 대학에 입학해 1982년에 졸업했으니까 지금의 덕성여자대학교와 조금은 다른 형태의 학교를 다녔다. 지금의 쌍문동 캠퍼스가 완공되기 전 공사 중이어서 졸업 할 때까지 운니동캠퍼스에서 공부했었고 체육시간에만 학교 스쿨버스를 타고 현재의 캠퍼스를 왔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는 재단문제도 없었고, 구재단이라는 개념도 없었다. 구재단의 그 분이 창립자인 줄 알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한 학년이 500여 명, 전체 재학생이 2천여 명인 작고 조용한 캠퍼스였다. 2학년 때인 1979년 10.26과 3학년 때인 1980년의 5.18민주화 시위 후 전국의 모든 대학 두 번의 긴 휴교를 맞았기 때문에 잠깐의 개강 후 4학년을 마치고 졸업을 해서 대학시절은 시위와 휴교가 기억에 많이 남는다.

  오늘 인터넷에서 덕성여대에 대한 기사를 찾아보니 <등록금 인상 및 구재단 복귀 반대!>라는 기사를 보고 가슴이 서늘해졌다. 다시 시작했구나. 학생회 간부의 삭발식 기사를 보고, 민주동산은 학생들의 눈물로 가득 찼다는 기사를 보고 컴퓨터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웬 주책없는 눈물이람. 늙어서 그런가? 다른 동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재빨리 닦았지만. 어린 후배들의 결연함이 묻어나는 기사 내용은 하루 종일 마음을 무겁게 한다.

  현실적으로 동문입장에선 학내문제는 조속히 해결돼고 재학생들은 타 대학생들과 비교해서 경쟁력을 갖추었으면 좋겠다. 많은 청년들이 ‘88만 원 세대’라는 타이틀로, 비정규직으로, 청년백수라는 단어가 일반 명사가 되어버린 사회로 쫓기듯 내몰리는 2011년 대한민국에서, 뛰어나지는 않지만 보통의 경쟁력이라도 갖추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지금부터는 덕성여대와 학내분규라는 연관어는 과거의 역사 속에 남도록 보다 많은 재학생을 포함하여, 교직원, 동문들이 뜻을 모아야한다. 자신이나 자신의 그룹이 속한 작은 이익은 내려놓고 보다 긴 안목으로, 정의라는 단어를 머리 속에 간직하고. 1920년 차미리사 선생이 덕성여대의 전신인 근화학원을 세웠을 때의 그 정신으로. 이것은 학생총회에 참가한 853명의 관심사만 아니고, 재학생 5,000명만의 관심사만도 아니다. 재학생들만의 외로운 싸움이 되질 않길 바라며.

  얼마 전 사석에서 고등학교 3학년 담임이라는 선생님이 내가 덕성여대 졸업생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 아픈 이야기를 하셨는데, 비슷한 성적의 학생들을 A대학과 덕성여대에 보냈는데 A대학으로 간 학생들이 만족도가 훨씬 높다고. 덧붙이는 말씀이 “졸업생들은 학내문제에 전혀 관여하지 않아요?”라고 물었다. “관여해요”라고 대답했지만 몇 달이 지난 지금도 그 질문이 머리속을 무겁게  맴도는 건 왜 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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