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선의 미로
직선의 미로
  • 이종득(스페인어) 교수
  • 승인 2012.11.19 15: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덕성여대 도서관은 모음 10개와 자음 14개의 무한 조립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도서 목록 번호를 찾아가다보면 도서관이 4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길을 잘못 들면 한 없이 위로 올라가거나 내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도서관은 팔각형이고, 각 층의 8개 열람실은 대칭으로 놓인 8개의 책장으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도서관의 비워있는 중심부를 따라 각 층을 연결하는 원형의 계단이 끝없이 나있다. 이러한 은밀한 비밀은 입에서 입으로 전수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알고 있는 학생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기말고사 이후 밤늦은 시간에 도서관의 문을 급히 빠져나오는 학생들 중에 몇 명은 이 원형계단을 발견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덕성여대 신문사로부터 ‘사랑’을 주제로 한, 글을 청탁받았을 때에 나는 도서관의 새로운 구조를 우연히 발견했다(‘필요’에 의해 창조했다. 아니 ‘수정했다’라는 고백이 양심적이다). 양극의 2개 기호 사이에 존재하는 선은 직선이며 단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직선에는 끝없는 미로가 존재한다. 이러한 미로를 만든 누군가는 인간보다 월등히 뛰어난 존재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사실을 증명해 보이려는 몇몇 인간들을 위해 아킬레스는 거북이와 내키지 않는 달리기 경주를 벌여야만 했다. 그러나 거북이가 극미한 차이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경기는 웃음거리로 남아있거나 인간의 기억에서 지워졌다. 이러한 내용은 도서관 2층의 한 열람실, 2번째 책장의 둘째 칸에 꽂힌 책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음 책장에 있는 한 책은 중요한 사건을 기록해 놓았다: “두 변의 길이가 1인 직각삼각형에서 표기할 수 없는 수를 찾아낸 사람이 바다에 던져졌다.”

  사실, 미로는 매우 오래전부터 우리의 존재 형태였다. 이러한 사실을 나는 도서관 맨 아래층의 한 책에서 오래전에 찾아냈었다(아니 상상했었다). 그 책에는 곰팡이와 이끼가 잔뜩 끼어 글자 형태가 흐릿했고, 좀이 슬어 구멍이 나 있었다. 그러나 그 층의 마지막 열람실을 빠져나오다 누군가 걸어둔 공룡의 송곳니에 꼬리뼈를 다친 이후에는 마지막 층을 다시 방문하지 않았다. 동종이 아닌 생물과의 교감이 어려웠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당시의 아픈 기억을 다시 들추어내기 싫었기 때문이다.

  나와 비슷한 동물들을 처음 기록한 책은 지하 9층의 3번째 열람실에 있다. 뒤뚱거리며 두 발로 걷는 그들을 보고 지나치는 토끼조차도 비웃었다고 적혀있다. 다음 책장에서는 매우 중요해 보이는 책 한 권을 찾아냈다. 이상한 동물들이 가을이 아닌 때에 사랑을 하고, 그 자세는 엉덩이가 아닌 얼굴을 마주보는 것이었다고 쓰여 있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다음 쪽에서는 그 괴기한 모습에 많은 동물들이 경악했고, 수치감을 느낀 호랑이와 늑대가 이들을 집단 내에서 내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옆에 있는 다른 책은, 쫓겨나는 무리를 바라보며 원숭이가 20일 동안만 식음을 전폐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몇 층을 건너 뛰어 올라가다 출입구 위에 붙어 있는 종이를 발견했다: 아버지는 딸을 사랑할 수 없고, 한 여자만을 사랑해야 한다.” 왠지 낯익은 문구가 나의 발걸음을 잡아끈다. 4번 열람실, 4번 책장의 4번째 칸, 4번째 책에서 그 이유를 어렵게 찾아냈다. 줄어드는 농지를 불안스럽게 바라보던 노인 몇 명이 모여 앉아 정한 규칙이었다. 이 규칙이 적힌 종이는 원형계단을 올라가며 발견하는 출입구마다 어김없이 더 크게 붙여져 있다.

  다음 층에 있는, 어떤 책 끝 부분에는 구부정한 노인이 금으로 만든 지팡이를 앞세우고 내뱉은 말에 진하게 줄이 그어져있다: “인간의 사랑은 타인의 시선 아래 공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예측은 하고 있었지만 급작스러운 것이어서 많은 혼란이 일었다고 당시의 책들은 전한다. 사과를 따먹은 남녀가 부끄러운 부분을 갑자기 ‘창조’했을 때처럼 인간들은 손과 주변의 풀들로 그 부분을 급히 가려야 했다. 개중에는 남자가 가져다 준, 멧돼지 뒷다리로 가린 여자도 있었다. 당시의 한 현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우리는 직선의 미로에 다른 미로를 추가하는 죄를 범했다.” 이 책은 8번째 열람실, 출구 옆 마지막 책장의 맨 아랫단에 꽂혀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책장 마지막 단의 먼지 쌓인 책들은 꺼내들지 않는다.

  다음 층부터는 각 열람실의 책들이 풍성해지고 복잡해졌다. 양극 점의 직선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점들이 하나의 소리로 빠르게 번식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윤리를 다루고 있는, 한 책은 미친 시인의 언행을 신랄하게 규탄하고 있다. 그가 다음과 같이 말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소리에는 항상 자책이 묻어있고, 나이 들기 전에 성숙해 버린 아이의 두려움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가끔은 수많은 소리를 한 점으로 수렴시키려는 부류들이 나타났다. 새로운 정점(·)의 미로를 창조하기 위해 누군가는 산속으로 들어갔다. 어떤 이는 울며 매달리는 처자식을 발로 걷어찼고, 열십자로 묶은 나무에 매달리기도 했다. 우려의 목소리는 사창가의 여인을 끌어안은, 술 취한 젊은이의 입에서 나왔다: “우리의 미로를 거부하고 상대 기호가 부재한 정점의 미로에만 탐닉한다면 우리 종족은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우아한 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상대의 영혼만을 바라보겠다는 경건한 서약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운명은 한 장의 초상화에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인도로 떠나기 전에 콜럼버스는 무릎을 꿇고 이사벨 여왕의 손을 애절하게 붙잡았다. 그러나 페르난도 왕은 콜럼버스의 손을 못마땅하게 곁눈질하고 있다.

  단지 몇 개의 인용과 간단한 주석으로 수많은 층을 건너뛰어야 할 것 같다. “천일야화”만큼 지루한 이야기가 있을까? 여러 층을 건너뛰다 한 시인의 소리에 걸음을 멈춘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잊혀 진 미로는 이런 부류의 인간들에게 잔흔과 언어적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흔적의 기원을 찾아 이들은 오랜 책들을 조심스럽게 펼쳐보며 열람실을 끝없이 맴돌고 있다. “도서관의 책들은 사랑에 대해 말하길 오래전에 포기했고, 도서관 문을 열고나올 만큼의 용기는 인간에게 아직은 부족하다”라는 글을 8번 열람실 출구 옆에서 발견하려면 그들의 여정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지상 13층에서 아르헨티나의 한 맹인과 마주쳤다. 그는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다: “인간의 섹스는 혐오스럽다. 거울의 무한증식과 같이 인간의 수를 끝없이 증식시켰기 때문이다.” 평생 도서관 사서였던 그는 생의 전부를 직선의 미로를 풀기 위해 바쳤다. 그러나 그에게 남은 것은 볼 수 없는 두 눈과 49권짜리 백과사전뿐이다. 노벨의 그림자에 가려진 한 사내가 다이너마이트 폭음으로 가득 찬 런던에서 외친다: “나는 사랑에서 천상의 축도를 보았다.” 입에 문 파이프에서는 독일군 폭격기에 불타는 런던의 화염이 솟아오르고 있다.

  도서관의 원형계단은 하늘과 아스라이 맞닿아 있다. 도서관 중심부를 통해 입사각과 반사각의 비율을 유지하며 석양의 잔흔이 뿌옇게 내려 않는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나의 사랑은 13층의 한 열람실에 꽂힌 한 권의 책, 그 책 한 쪽의 한 글자였다. 그리고 지나온 각 층의 열람실은 메아리 구조로 되어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입구의 소리는 항상 흥분과 기대로 가득했다. 그러나 출구 가까이 갈수록 소리는 생기를 잃고 공허한 저음으로 웅얼거리다 도서관 중심부로 빠져나갔다. 각 열람실의 입구와 출구는 동일하다.

  열람실 한 층을 온전히 순례하는 것이 도서관 모든 층을 여행하는 것과 동일하다는 생각이 엄습한다. 마지못해 기어오르듯 도착한 새로운 층에서는 포르노가 생물학이다. 그리고 직선의 미로는 끊을 수 없는, 나선형 쇠사슬의 숫자 조립이다. 이러한 사실을 기록한 책의 겉표지에는 현미경의 접안렌즈가 선명하게 인쇄되어 있다.

  숙주로서의 의무를 다한 두 다리가 힘없이 풀리고 신성한 부분은 향기를 잃었다. 알 수 없는 냄새에 이끌려 어머니의 자궁 속을 질주했던 과거를 잊고, 또 다시 알 수 없는 미로를 쫒아 하늘 높이 올라와 있다. 종이 한 장이 저 위 어느 층으로부터 떨어진다. 집어든 종이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다.

“아버지는 딸을 사랑할 수 없고, 한 여자만을 사랑해야 한다.”

  읽은 종이를 구겨서 난간 밑 아래층으로 던진다. 이런 내용의 종이가 처음 붙여졌던 층에 구겨진 종이가 도달하면 인간이 만든 직선의 도서관은 환영처럼 무너져 내릴 것이다.

  오늘은 2012년 11월 11일 뻬뻬로 데이(day)이다. 나의 덕성여대 메일에는 오늘도 많은 스팸메일이 도착해 있다. 세상의 유혹과 타락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 학교의 전산 직원은 이를 administrator라는 이름으로 위생 처리해 놓았다. 그곳에는 비아그라 구입을 권하는 선전 23개, 나를 유혹하는 젊은 여자 아이들의 판박이 메일이 34개, 야한 동영상을 소개하는 사이트가 12개 있다.

* 2012년 11월 8일(목) 도서관에서 보르헤스(Borges) 세미나를 같이 한, 학생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도봉구 삼양로144길 33 덕성여자대학교 도서관 402호 덕성여대신문사
  • 대표전화 : 02-901-8551, 8558
  • 청소년보호책임자 : 고유미
  • 법인명 : 덕성여자대학교
  • 제호 : 덕성여대신문
  • 발행인 : 김건희
  • 주간 : 조연성
  • 편집인 : 고유미
  • 메일 : press@duksung.ac.kr
  • 덕성여대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덕성여대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ress@duksung.ac.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