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칼럼] 두 나라 이야기
[교수칼럼] 두 나라 이야기
  • 신지영 (독어독문) 교수
  • 승인 2014.03.03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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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여름 나는 독일의 쾰른에 있었다. 북적이는 쾰른 시내 한복판에 서 있는 커다란 광고판에는 화려한 쇼윈도들과는 어울리지 않게도 아우슈비츠수용소 입구를 찍은 흑백사진이 실린 대형 플랜카드가 붙어 있었다. 수용소를 배경으로 ‘늦었지만 아직 너무 늦지는 않았다’라는 슬로건이 선명한 그 플랜카드는 그해 여름 베를린과 함부르크, 쾰른 등 독일의 대도시에 게시된 2천 부의 플랜카드 중 하나였다. 이 플랜카드는 ‘마지막 기회 작전 II’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처벌받지 않고 숨어 사는 나치전범자들을 현상수배하고 있었다. 2차 대전이 끝난 지 60년, 유럽에서 독일의 경제적·정치적 위상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진 지금 독일인의 시계는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인가? 왜 그들은 독일 역사의 가장 어둡고 고통스런 기억을 스스로 되새기는 것인가? 2007년 메르켈 독일 총리는 예루살렘을 방문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 나라 독일은 그 끔찍했던 시대와 독일 역사에 기록된 잔혹한 범죄에 대한 책임을 지속적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받아들일 때에만 비로소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방법밖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2013년 말, 일본의 아베 총리는 1급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일본의 미래는 과거로 회귀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이런 가운데 나는 또 하나의 기억을 떠올렸다. 후쿠시마 발 방사능 공포가 한국의 일상에까지 파고들던 지난 여름, 일본산 수산물이 밥상에 오르지 않을까하는 염려에서 전반적으로 수산물 소비가 위축되고 사람들은 꺼림칙한 마음으로 생선을 먹었다. 그 여름도 끝나가던 무렵 국제학술대회 때문에 일본에서 온 손님들에게도 방사능에 대한 질문은 빠지지 않았다. 도쿄 사람들은 방사능 공포 속에서 어떻게 일상을 살아가는가? 도쿄에서 오신 노교수님은 도쿄 사람들이 세계 어느 곳에서보다 덜 오염된 해산물을 제공받는다고 믿고 있다고 했다. 검사가 강화되었기 때문이란다. 그는 심지어 ‘후쿠시마 산(産)’이라고 표시된 해산물의 안전성은 한국산이나 중국산보다 더 높을 것이라고 말했다. 후쿠시마 산이라면 더 철저한 검사가 이루어질 것이니까. 재치 있는 반전이었지만 나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이야기는 그 다음이었다. 나는 그 검사 결과를, 그러니까 정부를 신뢰할 수 없는 것이 문제라고, 양심 없는 상인들이 원산지를 속이는 것이 문제라고 항변했다. 그러자 노교수님은 정부와 상인들을 다 믿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당신이 속아서 방사능에 오염된 해산물을 먹는다고 해서 그게 그렇게 비극적인가 하고 되물었다. 여기서부터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계속해서 그는 말했다. 대다수의 도쿄 사람들이 정부의 발표와 검사치를 믿고 수산물을 소비하는데 나만 믿지 않고 오염된 수산물을 먹지 않아서 살아남았다고 치자. 그런데 그런 삶이 의미가 있는가? 재앙은 어느 곳에나 있다. 핵폭발로 인한 방사능 오염으로 지구가 사람이 살 수 없는 행성이 되어도 몇몇 사람들은 우주정거장이나 다른 행성으로 피해 목숨을 구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삶이 의미가 있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고 나만 살아남는 것이 행복한가?

  그때 나의 말문을 막아버린 것은 연대감이나 인간애로 지칭될 수 있는 노교수님의 현명한 인생철학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도 일말의 의구심이 나를 불편하게 했다. 위안부 문제, 교과서 문제, 독도와 센카쿠 열도를 둘러싼 영토 분쟁 등 현재 일본 정치가들의 행태를 보면 일본인들의 ‘한 목소리’, ‘같이 죽을 수 있는 용기’는 주변국들에게는 위협이 아닐 수 없다. 식민지 과거로 회귀하는 일본이 동북아에 조성하고 있는 긴장과 대결 양상은 1차 대전 직전의 유럽을 방불케 하며 아베의 ‘강한 일본’은 히틀러의 ‘강한 독일’을 떠올리게 한다. 나치시대 독일의 범죄는 히틀러 개인의 행위가 아니었다. ‘강한 독일’을 만들겠다는 히틀러와 나치의 선전을 믿고, 이른바 ‘독일인의 미덕’, 즉 복종과 용기로 무장한 평범한 독일인들 전부가 공범자였다. 그때 독일인들은 나라를 위해 죽을 용기는 있었지만 의문을 제기하고 거부할 수 있는 용기는 없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나치범죄에 대한 독일인들의 ‘집단적 책임’이다. 일본 사람들과 지식인들은 우경화하는 정치에 의문을 제기하고 죽을 수 있는 용기보다는 거부할 수 있는 용기가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일본이 과거에 발목 잡히지 않고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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