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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회 학술문예상 수필 가작>
2014년 11월 25일 (화) 23:05:16 정보라(문화인류 4) -

<곽 폐인의 고백> 

  안녕, 랑? 뜬금없이 편지를 투척해서 미안. 이 부끄럽고 민망하고 별 것 없는 이야기의 시작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한참을
 망설이다 펜을 든다. 혹시 벌써 3년 전 일이 되어버린 2011년 겨울의 망년회를 기억하니? 불판 위 등갈비의 핏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네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던 우리의 엉망진창 망년회. 내 생애 그런 망년회는 처음이었지.
  너와 나, 그리고 그 해 함께 아르바이트를 했었던 장과 김 넷이 모인 자리였어. 장과 김 군대 가기 전에 다함께 보기로 했었잖아. 우리는 자주 가던 식당에서 등갈비 4인분을 주문했고 고기에 환장하는 나는 오직 등갈비에만 집중하느라 너와 장이 하는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어. 그래, 그렇게 모든 말들이 공기 중으로 흩어져 버렸으면 참 좋았을 텐데. 유독 한 문장만이 장의 입에서 나왔던 그대로 내 귀에 꽂혀 들어왔어. 그 즈음 내게 아주 또렷하고 선명했던 그 이름.
  “곽은 잘 지내?”

  곽은 너와 내가 동시에 알고 지내는 남자였지. 장과 전혀 안면이 없는 곽을 장이 어떻게 알고 안부를 물어봤을까 궁금해진 찰나, 넌 분노에 찬 눈빛으로 아무 말 못하는 장을 한참 노려보더니 그대로 네 흰색 패딩을 들고, 안녕이란 말도 없이 자리를 떴어. 생각해보니 너 그 때 한 성깔 하긴 했구나. 당황한 장이 급히 뒤따라나갔지만 다 익은 등갈비를 먼저 먹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난감해할 만큼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장 혼자서만 돌아왔어. 즐겁게 놀자고 만난 자린데 분위기를 처지게 할 순 없어서 우린 마치 아무 일이 없던 것처럼 고기를 먹고 호프집으로 자리까지 옮겼다. 근데 아닌 척 했지만 장 마음이 불편했던 가봐. 평소와 다르게 술을 대중없이 들이키더니 순식간에 취했고, 냅다 내 손을 잡고 집에 가지 말라느니 택시비 줄 테니까 새벽 5시에 들어가라느니 망언을 일삼다가 탁자 위로 꼬꾸라졌어. 그 옆에서 맥주를 홀짝이던 김은 자긴 말짱하다는데 혀가 꼬여있더라. 내 기분이 어땠겠니. 진짜 말술 먹고 싶은 게 누군데. 오늘은 일찍 들어가고 내년에 다시 만나자고 겨우 구슬려 장을 들여보낸 후, 집이 같은 방향인 김과 버스를 탔는데 김이 속이 이상하대. 급히 길음역 정류장에 내리자마자 김은 웩웩 토를 했지. 흉한 꼴 보여 미안하다는 김에게 아니다, 괜찮다, 오늘 재밌는 일 많아서 진짜 못 잊을 것 같다며 애써 위로해주고 하늘을 올려 보는데 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라. 멀미로 속이 뒤집어진 김과 다른 의미로 속이 뒤집어진 나는 조금 걷기로 했는데 굉장히 어정쩡한 분위기가 조성됐어. 눈이 너무 예쁘게 날리는 바람에…. 게다가 가끔씩 멈춰 서서 김이 내 머리 위의 눈을 너무나 조심스런 손길로 털어주는 거야. 겉으론 ‘아, 뭐야.’하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좀 의식이 됐던 것도? 아…돌이켜보니 좋은 시절이었네.
  개판이 된 망년회를 마치고 돌아온 그 날 밤 나는 내내 생각했어. 장이 곽을 어떻게 알까. 넌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 장이 곽의 안부를 물은 게 뭐 그리 대수라고. 근데 장은 곽을 알면서 왜 내 앞에선 내색 안 했지? 이 모든 질문들 끝에 오게 될 분명한 정답을 너무나 빤히 알면서도 나는 인정하기가 싫었나봐. 밤새 그 정답을 부정할 온갖 확률과 변수들에 대해 궁리했거든. 다 부질없는 짓인 거 알면서도 말이야. 곽은 잘 지내? 이 말 뒤에 이어졌던 잠깐의 정적, 너와 곽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챈 나의 직감과 내 직감을 눈치 챈 너의 직감이 짠하고 부딪혔던 그 순간, 이미 모든 게 정리된 일인데. 그런데 갑자기 이런 이야기는 왜 꺼내놓는 거냐고?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사실 나 오래전부터 곽을 좋아했었어. 그렇지 않다면 장이 곽에게 안부를 묻든 말든 내가 무슨 상관이 있었겠니. 넌 아마 몰랐겠지만 그 해 겨울 난 오직 한 영화밖에 상영할 줄 모르는 덜 떨어진 영사기사 같았어. 매일매일 곽만 생각했거든. 좀 오글거리겠지만 참아줘, 진심 그랬으니까. 크리스마스를 노리고 나온 온갖 밝은 분위기의 노래들에 주인공인 곽과 내가 눈을 맞추는 장면, 수줍게 손을 잡는 장면들이 매일 밤 잠들기 전 감긴 눈 위로 필름처럼 펼쳐지던 날들이었지. 내 마음이 얼마나 싱숭생숭했겠어! 넌 아마 내 기분 모를 거야. 직접적 체험과 간접적 체험은 천지차이 아니겠니. 그 때의 나는 길을 걸을 때도,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혹은 무언가에 간절하게 집중해야했을 때도, 머릿속에서 곽이 둥실둥실 떠다녔다. 그렇게 매일 곽을 그리다 보니 꿈에 곽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꿈을 꾸고 난 뒤에는 이게 예지몽이지 않을까 더욱 기대하게 됐지. 곽과 내가 잘 될 것만 같은 예감 혹은 환상에 심장이 두근두근하던 겨울이었어. 쓰다 보니 나 정말 중증이었구나.

  여하튼 너와 곽이 그렇고 그런 사이인 걸 알게 된 그 날 이후, 난 밤에 잠이 안 왔어. 이제 내 영화 속엔 너와 곽이 나오기 시작했지. 눈만 감으면 둘이 어쩌다 사귀게 된 걸까. 누가 먼저 시작하자고 한 걸까. 랑일까? 랑은 여우라서 먼저 꼬리쳤을 수 있다. 곽이 순진해서 랑의 실체를 잘 모르는 걸 거다. 곽은 왜 하필, 랑을. 랑은 나빠, 곽 너 보는 눈 없구나? 주로 어디서 만났을까. 뭐하면서 데이트를 했을까? 그래 랑이 뭐 예쁘긴 하지. 날씬하고 피부도 좋고 눈웃음도 칠 줄 알고 아 여자는 결국 얼굴이란 말인가. 등등 이딴 생각들이 끝이 없이 이어졌어. 생각을 그만 멈추고 싶은데, 내 의지대로 되는 일이 아니더라. 결국 나는 깨어있는 시간 내내 아니 가끔은 꿈속에서도 자동 재생되는 너와 곽을 내 대뇌의 전두엽에서 밀어내기 위해 순간적으로 몰입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고 그 해 겨울 밤새 애니팡을 했다. 똑같이 생긴 동물들 셋이 만나 꺅꺅거리며 화면에서 사라질 때마다, 내 마음속의 너와 곽도 펑펑 터져주길 바랬어. 근데 너도 애니팡 해봤으면 알겠지만 그 빈자리는 결국 새로운 동물들로 계속 채워지잖아? 끝이 없었지. 너 애니팡 많이 하면 검지를 제외한 다른 손가락들은 핸드폰을 쥔 상태의 모습으로 굳게 된다는 걸 알고 있니? 굳어버린 손가락들과 함께 동이 트는 새벽을 맞이할 때면 내 자신이 얼마나 한심하고 초라하고 비참하게 느껴졌는지. 나는 그렇게 오그라든 것도 펴진 것도 아닌 어정쩡한 손가락들을 위로하며 잠들곤 했어.

 근데 그런 생각이 들더라. 둘이 사귀고 있다면 그냥 오픈해도 될 일 아닌가? 연애가 돌 맞아 죽을 짓도 아닌데 왜 감추는 거지? 곽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 넌 뭐가 그렇게 당황스럽고 또 화가 났을까. 그러다 문득 일말의 가능성이 있는 새로운 가설 하나가 떠올랐어. 혹시, 만약에, 어쩌면, 헤어진 상황이었던 게 아닐까? 정말 그런가? 그런 걸까? 그렇다면, 너의 모든 행동이 설명되는 것 같았거든. 그리고 내가 너와 곽에 집착하는 건 단지 그 사실이 못 견디게 궁금해서 그런 것 같다는 생각도 들더라. 사귀는 건지 아닌지 그것만 확실히 알게 되면 더 이상 관심 같지 않을 자신이 있었어. 물론, 그게 아니었다는 건 나중에 알았지. 그 땐 나도 내가 이렇게 또라이인 줄은 몰랐을 때니까.

  그리하여 나는 결국, 너와 곽의 미니홈피 혹은 이메일 주소를 토대로 손가락에 땀이 나도록 구글 검색창을 드나들며 너와 곽의 신상을 그리고 과거를 캤다. 혹시 내가 이렇게 뒤지고 다니는 걸 걸리게 되지는 않을까 PC방까지 가는 치밀함을 겸비해서. 이러한 사실들은 지금 쓰면서도 지울까 말까 망설여져. 할 수만 있다면 잊고 싶고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기억들이거든. 하지만 너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나 자신의 찌질했던 과거를 반성하는 의미로 다 꺼내놓을게. 아무튼 나는 곽의 SNS를 찾아냈고 커피 잔이 두 개인 사진들, 그 사진이 올라온 날짜들을 헤아리며 둘이 사귀었던 것만큼은 확실하다는 걸 알게 됐지. 덧붙여 내겐 친구라고 소개시켜주었던 곽이 사실은 너의 예전 남자친구였다는 것, 너와 곽은 지금 다시 만나는 사이라는 것도 함께. 근데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현재 헤어졌느냐, 아니냐가 중요하지. 나는 그걸 궁금해 했으니까. 하지만 그걸 확인할 수 있는 명확한 단서를 인터넷 상으로는 찾을 수 없었어. 해서 나는 직접 발로 뛰는 취재를 하기로 결심했어.

  돌이켜 보면 그 때의 나는 디스패치보다 집요했었지. 뭐라도 하나만 걸려라, 싶었어. 어쩌다 셋이 함께 하는 자리가 있을 때마다 너와 곽을 아닌 척 관찰하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내 눈동자는 너와 곽을 따라 자동차의 와이퍼처럼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더라. 바로 그 때! 완전 소름 끼치도록 들어맞지만 2년에 한 번씩만 발동되는 게 함정인 나의 직감이 ‘아, 둘은 아무래도 끝난 사이 같습니다.’라고 내 귀에 캔디처럼 속삭여 주는 거야. 네가 재미있는 듯 웃으며 누군가와 문자를 나누는 데 곽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더라고. 나는 본능적으로 네가 문자하고 있는 상대는 남자라는 걸 느꼈어. 게다가 얼마 전부터 두 개의 커피 잔 사진 같은 건 올라오지 않고 있었거든. 나는 이제는 모든 것이 명쾌해졌다는, 후에 몇 시간밖에 지속되지 않을 안도감으로 그렇게 취재를 종료했었지. 그 때가 아마 겨울이 지나가고 봄바람이 휘날리기 시작한 2012년 3월쯤이었을 거야. 바야흐로 해방의 봄날이었지. 그나저나 그게 벌써 2년 반이나 지난 일이었다니 세월이 너무 빠르다.

  그땐 너와 곽의 사이가 왜 그렇게 중요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걸 확인한다고 해서 뭔가 달라질 것도 아니었는데. 그리고 이런 생각도 들어. 나는 왜 너에게 곽에 대해 직접 물어보지 못했었나. 너 곽이랑 사겨? 그 한 마디가 뭐 그렇게 어려워서.

  사실 정확한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어. 꽤 가까운 거리라고 생각했는데 장에게 더 솔직했던 것에 대한 서운함이었는지 말하고 싶지 않아 쌩하고 가버린 이야기를 저기, 너…하며 꺼내기엔 내가 너무 없어보여서 그랬는지. 네 입에서 곽과 만나고 있다는 걸 직접 듣게 되면 내 마음이 너무 아플까봐 그랬었는지 아님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내 표정에서 감추고 있던 마음을 읽히게 될까봐 그러면 더 초라해질까봐 그랬었는지.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때의 나는 내가 궁금한 그 어떤 것도 네가 솔직하게 얘기해주지 않을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해.

   왜냐면 넌, 내가 아는 여우 중에 여우였거든.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그랬어. 그즈음 나는 네가 손해 볼 짓은 절대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거든. 남에게 얻어먹는 건 좋아하지만 베풀기는 싫어하는 것도. 그 얻어먹고는 싶지만 베풀기는 싫은 사람들 중에 내가 포함이 된다는 것도. 내겐 피자를 바라고 넌 김밥을 사주는 몇 번의 밥 사기 핑퐁을 주고받은 후 내심 표현은 안 했지만 난 마음이 상해 있었어. 우린 분명 친구사이인데 자꾸만 내가 너에게 이용당하는 것 같은 미묘한 기분이 드는 거야. 거기에 네 부탁은 한껏 눈웃음치면서 하고 내가 뭐 부탁하려 치면 정색부터 하고. 난 네가 전형적인 서울깍쟁이라고 생각했어. 덧붙여, 누군가와 아주 오래 우정을 유지하지는 못할 거라고도 생각했었지. 너무 이기적인 얘라고 생각했거든. 근데, 이런 네가 곽이 좋아하는 여자라는 사실에 내 심사가 좀 뒤틀렸겠니.

  그 후 난 너에게 아무 악감정 없는 척 나쁜 애 아닌 척 가끔씩 너를 깠어. 대놓고 깠으면 지금쯤 좀 덜 민망했을까. 그 땐 질투에 눈이 멀어서 내가 치졸한 사람이라는 생각도 안 들더라. 그냥 어떻게든 은근히 널 깎아 내리고 싶어서 안달이 난 상태였어. 너와 나를 아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은근히 너를 까면서 객관적인 척, 절대 질투가 아닌 척 했던 내 모습을 생각하면, 그리고 그 지인들 눈에 비쳐줬을 악에 받힌 내 모습을 생각하면, 정말 자다가도 발차기가 몇 번이나 날아간다. 난 그저 말로만 날리는 게 아니라 진짜로 날린다는 걸 너도 알고는 있을 거야.

  그리고, 사실 나는 그 뒤로도 쭉 곽을 좋아했다. 솔직히 나도 내 감정을 잘 모르겠어, 이게 사랑인지 아님 단순한 집착인지 익숙한 습관인지 아님 버리지 못하는 미련인지. 해서 나는 너와 곽을 생각하면 늘 불안했었지. 어린 시절, 그와 만났다 헤어졌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다시 만났다는 건 그만큼 깊은 인연이기 때문인 게 아닐까. 또 결국 돌고 돌아 다시 만나게 되는 건 아닐까. 곽과 너는 결국에는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 뭐 그런 건 아닐까. 그와 네가 결혼이라도 하게 되면 지금의 내가 얼마나 초라해질까. 그러기 전에 얼른 정신 차리고 사람답게 살아야지 싶더라. 좋은 곳에 취직하고 예뻐지고 멋있는 남자친구도 만나서 이런 이야기 하하호호 웃으면서 해야지 싶었어. 그런데 그게 생각만큼 쉽지 않더라. 현실은 여전히 곽에게 목매인 채로 더 매력적이지 못한 내 자신을 몰아세우다 위로하고 다시 자신을 망가뜨렸다 겨우 다시 추스르는 뭐 그런 지점토 같은 시간들이었어. 나는 여전히 버둥거리면서 그렇게 지내고 있었어.

  그러다 며칠 전, 나는 네가 한 대학신문에 인터뷰한 걸 보게 됐어. 기사 속의 너는 아주 열심히 살고 있는 것 같더라. 내가 너의 부족한 점을 단 한 가지도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속좁은 인간으로 살고 있는 동안 넌 네 나름의 삶을 충실히 살고 있었던 거야. 그냥 그걸 보는 순간, 내가 얼마나 초라해졌을지 네가 그 기분을 알 수 있을까? 랑, 아무도 보지 않는 혼자만 있는 방에서 얼굴이 빨개질 정도의 부끄러움을 느껴본 적이 있니?

   나는 곽을 좋아하면서 그리고 너를 질투하면서 찌질이 중에 찌질이가 되고 말았는데 그리고 지가 찌질이라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었는데 그 시간 동안 넌 값진 인생을 살고 있었다는 것에 내가 얼마나 민망했겠니. 나는 미주알고주알 모든 것을 털어놓는 내 친구에게도 네가 잡지 인터뷰에 나왔다는 사실을 차마 말하지 못했어. 너무 쪽팔렸거든. 왜냐면 내가 널 걔 앞에서 제일 많이 깠어요. 더불어, 나는 이제껏 뭐하고 살았나. 내가 그토록 비난하던 너는 오히려 네 인생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는데 나의 현실은 이게 뭔가 또르르. 

  랑은 앞으로도 더 잘 살아가겠지? 현실적이기도 하고 실천력도 있고 또 여우같은 구석이 있으니까 사람들도 잘 구슬리고 뭐 그러겠지. 절대 손해 안 보고 잘살 거야! 그리고 나도 잘 살자! 지난날은 잊고! 파이팅! 이렇게 끝나버릴 에피소드일 줄 알았는데, 그냥 그럴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 네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어. 왜 이렇게 점점 더 너에게 미안해질까? 모른 척 넘길 수 없을 만큼 너에게 너무너무 미안해져버렸어. 내가 그간 너에게 그러지 않았어도 될 지나친 비난을 퍼부었던 것만 같아서. 이미 내뱉은 말들은 너에게 닿았던 닿지 않았던 우주를 둥둥 떠다니고 있을 텐데. 주워 담을 수 없는 그 말들이 너무 부끄러워도 이젠 어쩔 수가 없는데. 그런데 내가 널 오랜만에 만나 대뜸 미안하다고 사과를 할 수도 없잖아. 우리 요새 만나지도 않는데.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털어놓고 사과를 구할 만큼 나는 이제 솔직하지도 순진하지도 않은데. 나도 많이 약아졌으니까.

  요샌, 내가 미처 떠올리지 못했던 추억들도 한 두 개씩 생각이 나. 물론 넌 깍쟁이였기 때문에 말하긴 뭔가 쩨쩨하고 그냥 넘어가자니 속이 개운치 않았던 일들도 여전히 내 기억  속에 남아있긴 해. 그래도 배고플 때면 자취하는 나를 너희 집에 데려가 너희 어머니가 해주신 집밥을 주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그렇게 밥 먹다 시간이 늦어지기라도 하면 너희 집에서 나를 재워주기도 했었지. 물론 한 번 뿐이었지만. 아빠가 노량진에서 회사오고 있으니까 집에 와서 회를 먹고 가라고 했던 적도 있었고, 난 예의에 어긋난다며 거절했고 결국 먹지 않았지만 네가 하던 조건이 좋은 아르바이트를 내게 물려주기 위해 노력했던 적도 있었고.  그땐 참 고마웠던 그런 일들이 왜 지난 3년 동안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다가 이제야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어. 차라리 생각이나 나지 말지, 그나마 덜 쪽팔리게. 나는 이제 너를 만나면 얼마나 민망할까, 그 생각만 난다. 네 뒤에서 비열하고 졸렬했던 그 모습들을 나만 알고 있어서 나는 더욱 부끄러울지도 모르겠다. 넌 웃으면서 인사할 텐데, 함께 웃으면서 인사할 내가 스스로 얼마나 가증스러울지 이미 알고 있으니까.

   참, 네가 곽과 만난 적이 있다는 사실은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었어. 너에 대한 감정이 어쨌건 그것만은 지켜야 할 것 같았거든. 근데 사실 뻥이고 두 명한테는 말했어. 술 먹다가 감정이 폭발했던 적이 한 두 번 있었거든. 너와 관련 있는 사람들은 아니니까, 너에게 해가 될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래도 조금 후회된다. 정말 나 혼자만 알고 있었더라면 너에게 덜 미안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아.

   내가 곽을 좋아했다는 것, 그래서 그 사람이 좋아했던 네가 질투가 났다는 것, 미워했던 것 같지는 않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랬던 것 같기도 했다는 것. 이건 나 혼자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잖아.

  하여 나의 이 미안함에 관한 진심은 갈 곳이 없었어. 갈 길을 잃고 이 폴더 저 폴더 방황하던 이 편지를 나는 어딘가에는 띄워 보려해. 유리병에 행운의 편지를 넣어 먼 바다에 띄우듯 세상에 내보내기로 한다. 인터넷에 한 번 올린 사진들은 계속 돌고 돌다 예상치 못한 게시판에서 다시 만나게 되듯이 이 양심고백을 겸한 사과도 돌고 돌아 언젠가 네가 이게 너와 나의 이야기인지 눈치도 채지 못한 채로, ‘이 여자애 진짜 찌질하네.’라고 생각해주면 좋겠다. 그리고 낄낄거리고 웃어주면 뭐 더 좋겠지. 좋은 게 좋은 거니까.

  그리고 이건 3년 만에 한 번씩 발동하는 나의 소름끼치는 직감인데 곽에겐 제 3의 여자가 생긴 것 같아. 그리고 나는 이제 더 이상 이런 짓은 못해먹겠다고 생각했다. 난 이 지루하고 진전없고 아무런 소득 없이 마음만 너덜너덜해진 거지같은 짝사랑을 마치려한다. 근데 그 제 3의 여자가 혹시 너일까? 하는 생각이 가끔씩 불현듯 드는 걸 보니 아무래도, 어쩌면 나는 아직 정신 차리려면 멀었나봐. 나는 어쩔 수 없는 또라이인가 봐.

  <제40회 학술문예상 수필 수상소감>
  메일의 보내기 버튼을 누른 뒤 1분도 지나지 않아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걸까 후회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골뱅이 뒷부분이 다른 메일은 회수가 안 된다는 사실에 절망했습니다. 누군가가 제 글을 읽는다는 게 부끄러워 발차기가 절로 나던 10월의 마지막 주가 떠오릅니다. 덕성여대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취소가 되나요?’라고 물어볼까 진지하게 고민했었지만 지금은 그때 통화버튼을 누르지 않았던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쓴 글이 신문에 실리게 된다는 사실이 여전히 부끄럽지만 또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합니다.

  우선 저의 손가락들에게 감사합니다. 특히 긴긴 겨울밤 애니팡과 구글링으로 지문이 점점 옅어지던 오른손 검지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고 힘내세요! 아직 현장연구보고서 반도 못 썼습니다.

  졸업을 앞둔 요즘 4년 내내 헛짓거리만 한 것 같아, 소중한 나의 시간과 감정을 함부로 썼던 것만 같아 순간순간 울컥할 때가 있습니다. 취업 준비와 자기계발에 박차를 가해도 모자랄 시기에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다는 자괴감에 빠져 있었는데 이 글을 쓰면서 세상에 헛된 건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말로의 아메리카노처럼 쓰고 그라찌에의 쿠키바닐라버블티처럼 달달한 추억들이, 부질없다고 생각했던 그 시간들이 학점은 가관이고 자격증 하나도 따지 못한 저에게 이름도 아름다운 학술문예상에서의 수상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해피엔딩을 선물해준 덕성여대신문사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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