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아버지는 노숙생활을 전전하다 객사했고, 연탄배달, 식당종업원 등으로 생계를 잇던 어머니는 뇌종양으로 쓰러졌다. 정부에서 나오는 생계비 60만원은 어머니의 치료비를 대기에도 부족했고, 빚은 자꾸 불어났다고 한다. “나는 우습게도 소녀가장이었고, 아버지도 안 계시는 불쌍한 아이였다. 이런 나에게 미래가 있을까?” 일본어, 컴퓨터, 음악 등 하고 싶은 게 많았지만, 현실은 그녀에게 꿈을 허용하지 않았다. 입학금 때문에 당장 고등학교 진학조차 불투명했다고 한다. “차라리 거리의 풀 한 포기로 태어났으면 좋으련만. 차라리 바람에 휘날리는 모래 한 줌으로 태어났으면 좋으련만.”
그녀처럼 ‘풀 한 포기’, ‘모래 한 줌’이길 희망하며 또 누군가가 죽음을 준비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뭐든 해서, 이 앙다물고 살아야지. 죽긴 왜 죽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말로는 또 있을지 모를 가난한 이의 죽음을 막을 수 없다.
어떤 고급아파트의 청약 기간 이틀 동안 우리나라 사회복지 예산 70%에 달하는 7조가 몰리고, 부자 5%가 우리나라 부동산의 50%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또 다른 세상이다. 어떤 사람은 일하지 않고도 수십억의 유산을 남기는데, 고된 일을 하면서도 빚을 지고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게으르다 말할 수 있는가. 하루하루 먹고사는 걱정에 한숨이 늘고, 속이 곯아 끝내는 유언 한 장 남기고 가는 사람들에게 나약하다 말할 수 있는가.
경쟁과 효율만을 추구하며 불안정한 노동과 삶으로 사람들을 몰아가는 이 사회가 문제다. 돈이 없어 배곯는 일, 학교 못 가는 일, 병원 못 가는 일은 없어야 한다. 집세가 없어 거리를 배회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가난과 불평등이 국가의 책임이고, 사회의 책임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러나 빈곤과 사회적 불평등에 맞선 사람들의 연대가 없다면, 부의 양극화를 조장하는 이 사회가 스스로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개인과 가족에게만 강요되는 절망의 벽을 넘고, 인간다운 생존, 평등을 향한 연대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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