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개척한 여성 9인의 위인전
삶을 개척한 여성 9인의 위인전
  • 덕성여대신문사 기자
  • 승인 2004.04.18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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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교 설립자 차미리사(1880 - 1955)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생각하되 네 생각으로 하여라, 알되 네가 깨달아 알아라.’
 본교의 설립자 차미리사 선생이 조선 여성의 자립을 위해 외친 이 교훈은 100의 세월이 지난 오늘날까지 여성들에게 많은 깨달음과 가르침을 주고 있다. 과연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얼마나 독립적이고 진취적으로 살고 있는가하는 반성과 함께 말이다.
 남녀 평등 사상의 선구자이자 민족운동계열 여성 교육가였던 차미리사 선생은 여성으로서 개척하는 인생이 무엇인지 그 일생을 통하여 몸소 보여 준 인물이다. 남편과의 사별 후 여느 아낙과는 달리 빈 집을 지키는 대신 과감히 중국행 배에 몸을 싣는 것을 시작으로 여성 해방을 위한 그녀의 시도는 하나 둘 씩 펼쳐지게 된다. 그 중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야학인 여성 강습소의 개설은 그 교육 대상이 학령이 초과한 여자나 젊은 가정부인, 과부, 외롭고 가난한 부녀 등 소외받는 여성들이라는 점에서 주목 받을만 하다. 여염집 규수들이 아닌 사회에서 가장 약자일 수밖에 없는 가난한 여인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준 것은 곧 그들의 고달픈 삶에 희망을 준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차미리사는 여성의 인격적인 독립에 있어서 경제적인 능력 향상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를 위한 실업교육 기관을 마련하기도 했다. 현 본교의 모태이기도 한 근화여자실업학교가 그것으로 여성에게 실제적인 능력과 합리적인 사고를 가지게 하기 위하여 일인일기(一人一技)의 교육을 실시한 것이다.
 차미리사 선생은 이렇게 누구보다 앞선 시대적 감각으로 각종 제도권과 사회 문화적 편견에 맞서 여성의 자주와 독립을 주장하였다. 한 때 역사의 왜곡으로 그 업적과 명성에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적도 있으나 이제 그녀는 자랑스러운 덕성의어머니로, 여성해방 운동의 선각자로 세상 앞에 당당히 서고 있다.

영화 '낮은 목소리'의 감독, 변영주(1966-)

 변영주, 그녀가 세상에 처음 들고 나온 영화 '낮은 목소리'는 각종 영화제에 초청 받음은 물론 '세계 여성감독 작품 25'에 선정되는 등 세상의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았다. 크고 거친 소리가 무력으로 승부하는 세상에서 할머니들 몇몇이 모여 내는 '낮은 목소리'에 누가 관심을 둘까? 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얼룩진 역사에서 잊어서는 안 될 정말 중요한 이야기인 만큼 사람들은 차츰 영화 속 낮은 목소리에 자신들의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1994년 '낮은 목소리'를 시작으로 97년 '낮은 목소리 2'와 99년 '숨결'에 이르기 까지 세 편에 걸쳐 그녀가 카메라에 담아낸 것은 종군 위안부였던 할머니들의 삶의 지워지지 않는 아픔이었다. 이 영화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 바뀐 듯, 무엇 때문에 왜 부끄러워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묻혀지기 바빴던 종군위안부 문제를 대중에게 널리 알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뿐더러 이들을 위해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않는 정부 측에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그녀가 영화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비단 종군 위안부 할머니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오늘날에도 버젓이 존재하고 있는 성폭력을 비롯한 여성에게 가해지는 물리적, 정신적인 모든 폭력으로부터 우리는 과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몇 십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이 땅에서 여성으로 살기란 여간 더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변영주 감독은 '낮은 목소리' 이후에도 자신의 첫 상업영화라 할 수 있는 '밀애'가 2002년 여성 관객이 뽑은 최우수 영화로 선정되는 등 호평을 받으며 감독으로서의 그 재량과 능력을 펼치고 있다. 아직까지도 세계적으로 여성감독의 존재나 그 위치가 미비한 만큼 앞으로 그녀가 영화계에 큰 획을 긋는 거장으로 성장하길 기대해본다 .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1896 - 1946)

 나혜석, 국내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문필가인 그녀에게는 이외에도 ‘여성 해방운동가’와 ‘진보적 사회 사상가’, ‘자유 연애 주의자’ 등과 같은 수많은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일본 도쿄의 여자 미술대학에서 유학을 하고 성공리에 첫 개인전을 마친 이후에도 그녀는 자신에게 만족하지 않고 문필활동까지 하여 뚜렷한 여성의식을 보여주는 소설 「경희」를 발표하였다. 또한 결혼 후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도 힘쓰는 등 적극적이고도 진취적인 삶을 살았다. 하지만 남편을 따라 나선 유럽 여행길에서 만난 최린과의 사랑은 그녀를 한순간에 죄인으로 만들었고 결국 ‘이혼녀’라는 낙인까지 찍어 주었다.
 나혜석은 이미 자신의 그림이나 문필활동을 통해서 여성 해방의 가치관을 펼쳐 왔었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던 그녀는 사랑의 자유 역시 여성이기 전에 한 사람으로서의 권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과감히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었다.
 당시 시대가 요구하는 여성의 역할을 그대로 답습하여 한 남편의 아내로서 아이들의 어머니로서 온 몸과 마음을 다 받쳐 살았다면 그녀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좋은 아내’나 ‘훌륭한 어머니’정도로 끝나지 않았을까? 하지만 나혜석은 자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아는 여성이었다. 때문에 여성을 억압하는 봉건적이고 인습적인 사회에서도 그녀는 뚜렷한 자의식으로 자신의 글을 통해, 그림을 통해 여자도 하나의 인간임을 끊임없이 주장해온 것이다. 비록 이혼 후 경제적 궁핍과 외로움 속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하였지만 그녀가 페미니스트로서 걸어 온 삶의 여정은 그 어느 부와 명성보다 값진 것이 아닐 수 없다.

난민구호가 '바람의딸' 한비야 (1958-)


 좋은 학벌, 안정된 직장. 사회가 제공하는 안락과 편안함은 한비야를 막을 순 없었다. 멀쩡하게 다니던 회사를 나와 그녀가 간 곳은 모두가 마다하는 세계 곳곳의 오지들이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예쁜 것, 편한 것, 나만을 위한 것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녀에게 그것들은 사치일 뿐이었다.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지난 7년 동안의 세계 여행을 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이 모여 지금의 난민구호 활동가 한비야가 탄생했다. 그녀가 지난 96년 아프가니스탄 난민촌을 방문하였을 때 팔다리가 하나씩 없는 한 여자아이가 건넨 빵을 한 조각 베어 물자 그 곳 아이들이 손뼉을 치며 좋아하였다. 난민촌에서 벌어지는 작은 감동들은 그녀를 그곳에 있게 하는 동기가 되었다. 여자의 몸으로 쉬운 결정은 아니었음에도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는 더욱 더 난민들에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약간의 억압이 삶에서는 더 큰 에너지로 증폭된다고 그녀는 믿는다. 그래서 그녀는 오히려 자신이 여자이기 때문의 지금의 자신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여자들이 살기에 힘이 드는 나라지만 그것을 기회로 삼아 더욱 헤쳐가기에 ‘바람의 딸’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이 아닐까. 모든 재난의 현장에서 피해자는 여성이지만, 그것을 일으켜 세우려는 주인공도 여성이라 주장하는 그녀는 여느 남성들보다 강한 모습을 보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프리카에는 정작 이용해 본 적이 없는 프레온 가스 때문에 지구온난화의 희생자가 된 주민들,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고 있는 아이들이 많다. 그런 이들을 도우며 보람을 찾는 그녀에게서 우리는, 모든 것을 포옹하고 한계를 뛰어넘는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연대의 고은광순(1965-)


 '남자는 씨고 여자는 밭이다?' 그러니 성씨는 씨를 준 남성을 따라야 한다는 말장난 같은 논리가 여전히 통용되는 세상이다. 하지만 정자만 씨고 난자는 씨가 아닌가? 씨도 주고 밭도 주는 여성들로서는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우스갯소리나 농담거리로도 말이 안 되는 이러한 사실이 마치 진실인 마냥 버젓이 존재하고 있는 곳, 바로 여기 남성들만의 대한민국에 경종을 울린 여성이 있다.
 98년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의 모임을 결성한 한의사이자 국회의원인 고은광순. 그녀가 호주제 폐지와 부모성 함께 쓰기 등 양성평등 운동에 뛰어 든 것은 그 어떤 거창한 이유가 아닌 세상에 통하는 '상식'을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한국 사회에도 적용시키기 위함이었다. 한의사가 된 뒤 그녀는 아들을 낳는 명약을 찾고, 태아 감별 뒤 여태아일 경우 낙태를 요구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가부장적 부계혈통의 폐해를 직시할 수 있었다. 이렇게 호주제라는 이름아래 그 무엇보다 평등해야 할 가족이 서열화 되고 그 속에서의 여성들은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당하거나 차별을 받는 것이 냉혹한 우리의 현실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녀는 호주제 폐지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유인물이 담긴 배낭을 메고 국회의원 한사람 한사람을 직접 찾아가 설득하는 등 열의와 정성으로 호주제 폐지를 단순한 바램이 아닌 현실로 만들고 있다.
 작년 8월말 법무부는 국민 개개인의 신분을 등록하는 '개인별 신분 등록제' 도입의 민법개정안을 발표했다. 호주제가 완전히 철폐될지는 아직 두고 봐야 할 일이지만 사회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힘든 걸음으로 여기까지 온 그리고 앞으로도 걸음을 멈추지 않을 고은광순과 호주제 폐지를 위한 여성들의 노력은 높이 평가 받아야 하지 않을까?

한국 여성 최초의 국제 축구 심판 임은주(1966-)


 한경기에서 축구심판이 뛰는 거리는 13킬로미터가 넘는다. 그렇기 때문에 남성도 체력적으로 뒷받침되지 않으면 전후반 90분을 뛰는 것이 힘들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도전한 임은주씨는 1994년 3월 3일 한국여성 최초의 국제축구심판이 되었다. 불가능하다고 자포자기하며 속을 끓이기 보다는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 체력이 한계라는 장벽에 절망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가 지금의 자리에 있을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임씨는 1994년 여왕배 여자축구심판상을 수상하였으며, 1998년 2월 2일 대한 축구협회 소속 21명의 심판들과 함께 FIFA로부터 한국 여성으로는 최초로 국제축구심판으로 공인받았다. 가장 좋아하는 단어가 ‘도전’이라는 그녀의 목표는 박사과정을 마치고 스포츠 마케팅학 교수로 나아가 국제축구연맹(FIFA)의 국제 경기 심판으로 세계 최고의 축구행정가가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어려움을 이겨내고 노력했던 것처럼 그녀가 목표로 하는 꿈은 현실로 이루어지리라 기대한다.
 ‘불가능을 두려워할 것 같으면 도전하지도 않았다’는 그녀의 좌우명처럼 임은주 심판은 세상의 두터운 벽에 과감히 준비하고 도전하는 아름다운 여성이다. 최초의 길을 걸어 간 사람의 발자국은 그대로 길이 된다고 했다. 그녀는 어렵고 불가능한 길을 걸어가는 모든이들에게 푸른 신호등이 될 것이다.

브노아 드라당스 최우수 여자무용수 강수진(1967-)

 그녀가 높이 평가 받아야 하는 이유는 85년 ‘스위스 로잔 콩쿠르’에서 동양인 최초 1위 입상을 시작으로 ‘브노아 드라당스 최우수 여자 무용수상 수상자’, ‘대한민국 보관 문화훈장’까지의 화려한 수상경력과 세계스타로서 그녀의 명성 때문만이 아니다. 바로 그녀의 ‘발’ 때문이다.
 너무 못생기고 상처투성인 나머지 아름다운 얼굴과 우아한 몸매와는 도저히 매치 되지 않는 그녀의 발은 곧 그녀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 그 가치관과 닮아 있다. 하루 19시간 연습을 하고 한 시즌에 닳아서 버리는 토슈즈가 150여개라 하니 그녀의 발이 온전치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다음 날 일어났을 때 몸이 아프지 않으면 연습을 게을리 한 것 같아서 불안할 정도로 ‘연습 벌레’인 그녀의 노력과 열정은 이미 세계의 스타 그 이상이라 말할 수 있다.
 무엇이 되겠다는 욕심보다는 순간 최선을 다할 뿐이라는 그녀는 그 노력 덕분에 한국인의 체형이 발레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세계적인 발레리나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자신의 살을 깎아내는 듯한 고통으로 세계의 장벽을 깨 부숴 나간 것이다.
 그녀는 프로다. 그것도 유럽 각 개국을 돌며 공연을 하면서 사람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고 사랑을 받으며 한국을 빛내고 있는 성공한 프로이다. 하지만 앞서 밝혔듯이 강수진을 이번 ‘위인 9’에 포함시킨 것은 그녀가 이루어낸 화려한 업적 보다는 그 과정에서의 치열하고도 눈물겨운 노력과 인내심 때문이다. 프로가 되고 싶은 당신에게 강수진의 발은 강한 촉매제로 그 어떤 위인의 가르침보다 큰 감동과 용기를 줄 것이다.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 이태영 (1914-1998)


 “나는 법과 인습에 억눌려 우는 한국 여성과 평생 같이 눈물을 흘릴 것이다.” 여성해방과 민주화를 위해 평생을 바친 이태영 선생. 그녀의 이름 앞에는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를 비롯해 ‘서울대 법학과 최초의 여학생’, ‘사법고시에 합격한 최초의 여성’등 많은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본래 그녀의 직업은 교사였다. 그러나 정일형 박사와의 결혼이 계기가 되어 제2의 인생을 펼 수 있게 되었다. 1946년 32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 여성 최초로 서울대 법합과에 입학하였고, 1952년에는 제2회 사법고시에 합격한다. 하지만 사법고시를 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 정일형 박사가 야당 정치인이라는 이유로 이승만 대통령이 판사 임명을 거부한다. 이 때문에 최초의 여판사가 되지 못하고 최초의 여성 변호사가 되는데 그친것이다.
 이 때부터 여성에 대한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그녀의 노력은 시작됐다. 1956년 한국가정법률상담소를 세운 그녀는 축첩반대, 가족법 개정, 동성동본 금혼제 폐지 운동 등의 결실을 이뤄냈다. 그녀는 여성해방운동에서 더 나아가 민주화 운동과 인권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평생을 소외된 자들, 서민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이고 그들의 편에서 일했다. 자신의 부와 명예를 뒤로하고 여성인권을 위해 희생한 그녀의 모습은 새삼 진정한 인생의 가치는 타인과 함께하는곳에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국내 최초에베레스트 산을 등정한 여성 지현옥(1962-1999)

 1993년 5월 10일 현지시간 19시 45분경 해발 8848미터 에베레스트 정상에 태극기가 꽂혔다. 이러한 쾌거를 이룬 장본인은 바로 산악인 지현옥씨. 이로써 그녀는 한국여성으로는 최초, 세계여성으로는 3번째로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여성산악인이되었다. 산은 결코 그녀를 허락할 것 같지 않았지만 도전정신과 불굴의 의지로 결국 등정에 성공한 것이다. 또한 지현옥은 이러한 도전정신으로 1998년 7월에 여성으로서는 세계최초로 파키스탄령 히말라야 가셔브룸 제2봉을 무산소 단독등정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1999년 4월 안나푸르나봉을 정복함과 동시에 생애를 마감하게된다. 네팔 히말라야중앙부에 높이 솟아있는 안나푸르나봉은 이미 많은 사람들을 얼음 속에서 잠들게 한 곳으로 많은 등반경험이 있는 그녀에게도 겨로 만만치 않은 상대였던 것이다. 위대한 여성 산악인의 죽음에 세인들은 안타까워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대자연에 대한 탐구와 도전정신으로 훌륭한 업적을 이루어낸 그녀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산을 대하면 언제나 자신의 오만함을 꺠닫게 되고, 준엄한 교훈을 얻는다"는 말을 남긴 그녀는 어떤 역경과 고난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대자연을 향해 도전하는 요기있는 여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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