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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하거나 순하거나 강하거나 독하거나, 어쨌든 여성?
2016년 03월 15일 (화) 19:09:38 임애정 부산대학교 여성연구소 전임연구원 -

20년 차 글쟁이가 고작 한두 페이지의 글을 쓰는데 한 주가 지나도록 제목 한 줄 못 적었다. 이미 관련 주제에 대해 여러 글을 써온 터라 한두 페이지 정도 ‘쯤이야’라고 생각하고 원고 청탁을 승낙했다. 그게 자만이었다. 매번 그렇듯 이 글쟁이는 자신이 ‘여성임’을 망각하고 ‘전문가일 뿐’이라고 착각한다. 그렇다. 이 글쟁이는 남편과 아이들이(집안)일감을 주는 사이사이에 글감을 틈틈이 써야 하는 아내이고 엄마다. 도무지 오직 글쟁이일 수가 없다.


   

 

  난 나일 수 있다고?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의 말대로 이 글쟁이 역시도 누구나 가지고 있는 몸(신체, body)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하필이면 세상 사람들은 이 글쟁이의 몸을 ‘여성의 몸’이라 한다. 여성이라 불리는 몸을 가진 이 글쟁이에게는 남성의 몸이라 여기는 ‘남편’도 있고 여아의 몸과 남아의 몸이라 여기는 ‘딸’과 ‘아들’도 있다. 여성의 몸을 가진 글쟁이는 사회에서는 학자라는 전문가가 되기도 하지만 가정에서는 아내가 되기도 하고 엄마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이 글쟁이는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de Beauvoir)를 비롯해 여러 학자들이 말하는 ‘되기(becoming)’를 숱하게 경험한다. 그간 경험해 온 숱한 ‘되기’는 ‘유독 몸’을 뿌리 삼아 여성되기란 몸통으로부터 ‘딸되기’, ‘아내되기’, ‘엄마되기’, ‘여교수되기’란 가지를 뻗고 있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의 말대로 이 글쟁이 역시도 누구나 가지고 있는 몸(신체, body)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하필이면 세상 사람들은 이 글쟁이의 몸을 ‘여성의 몸’이라 한다. 여성이라 불리는 몸을 가진 이 글쟁이에게는 남성의 몸이라 여기는 ‘남편’도 있고 여아의 몸과 남아의 몸이라 여기는 ‘딸’과 ‘아들’도 있다. 여성의 몸을 가진 글쟁이는 사회에서는 학자라는 전문가가 되기도 하지만 가정에서는 아내가 되기도 하고 엄마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이 글쟁이는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de Beauvoir)를 비롯해 여러 학자들이 말하는 ‘되기(becoming)’를 숱하게 경험한다. 그간 경험해 온 숱한 ‘되기’는 ‘유독 몸’을 뿌리 삼아 여성되기란 몸통으로부터 ‘딸되기’, ‘아내되기’, ‘엄마되기’, ‘여교수되기’란 가지를 뻗고 있다.
버틀러의 말대로 우리는 누구나 몸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이 몸은 반드시 노출돼 있기에 누구든지 박탈을 경험할 수 있는 취약한 몸이다. 그런데 그 취약함은 사회적이다. 즉 인간은 취약한 몸을 공통으로 가지고 있으며 이 취약한 몸들은 사회적으로 할당된 취약성을 여러 경로로 다시금 영속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한마디로 내 몸은 온전히 내 몸일 수 없다. 하지만 문제는 내 것일 수만은 없는 내 몸이 다시금 성적으로 호명되고 성적 규범에 의해 소환돼 곧잘 자기다움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나일 수 없어 고통스럽다. 당신은 어떤가, 안녕하신가.
   

 

 

 

 


  어쨌든 여성의 몸이어야 한다고?
  우리는 누구나 몸을 가지고 있다. 그것도 상실을 끊임없이 경험하는 취약한 몸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유독 그 몸을 둘로 나눈다. 여성과 남성으로 말이다.

  특히 여성의 몸에 대해서는 말이 많다. 연약한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순수해야 할 것만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강한 것 같기도 하고, 심지어는 독한 것 같기도 하다는 것이다. 설상가상 이런 ‘같기도’는 여성에 대한 성적 규범으로까지 굳어져 줄곧 여성의 삶을 재단하고 있기도 하다. 심하게는 여성을 단죄하는 규범으로까지 그 힘이 미치기도 한다.

  여성은 성별화 된 성적 규범에 의해 여성에게 기대되는 성적 순결을 지키고 모성을 발휘하면 사회의 적극적인 지지와 법의 보호를 받는다. 하지만 그 반면 이러한 성적 순결이 아닌 성적 자기결정권을 주장하거나 모성을 거부하고 자아 실현을 꿈꾸면 사회의 질타와 법의 무관심 속에서 소외를 경험하게 된다.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의 말대로 여성(woman)은 줄곧 남성(man)을 인간(Human)으로 만들어주는 남성과 다른 이(the other)이다. 여성은 남성이 인간일 수 있도록 부정과 혐오를 감내해 오고 있는 ‘남성과 다른 이들’인 것이다.

 
누스바움의 말대로, 놀랍게도 많은 남성들이 ‘진짜 남자’라면 매우 효율적인 기계처럼 모든 연약성과 동물성을 던져버려야 한다고 여기고 있다. 그래서 남성에게 여성(의 몸)은 너무나도 분명하게 출산과 성교와 관련돼 있기에 동물적 본성으로 상징되고 혐오스럽고 치욕스러운 것이 된다. 게다가 남성에게 여성(의 몸)은 남성과 전적으로 닮지 않았으면서도 이와 동시에 무섭게도 유사하기에 공포가 되고 억지로라도 떼어버리고 싶은 것이 된다.

  우습게도 남성은 자신이 여성적인 수용성과 연약성과는 전적으로 무관하다는 것을 보여야 ‘진짜 남자’가 된다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남성은 여성이 인간임을 부정하고 혐오하고 수치스럽게 여겨야 인간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은 ‘반드시 남성과 달리’ 연약하거나 순수하거나 강하거나 독하거나… 이어야 한다. 심지어 이때 여성은 ‘절대로 남성과 같이’ 연약하거나 순수하거나 강하거나 독해서는 안 된다. 한마디로 ‘어쨌든 간에 여성’이어야 한다. 진짜 남성의 몸이 진짜 인간의 몸이기에 여성의 몸은 어쨌든 남성과 다른 것일 뿐 아니라 어김없이 ‘달라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남성의 몸과 달리 ‘어쨌든 부정적이고 수치스러워야’ 한다.

   남성이 아닌 나의 몸은 어쨌든 여성의 몸이어야 한단 말인가. 그래서 연약하거나 순수하거나 강하거나 독해야 하는가. 심지어 인간이 아닌 혐오스럽고 수치스러운 것이어야 하는가.

  여전히 인간이 돼야 한다!
  공무원 직무연수에서 성 평등 내지 여성 인권을 주제로 강연하다 보면 교육에 참여한 이들 중 간혹 어떤 이는 여성 상위시대라며 볼멘소리를 한다. 또한 대학에서 법 여성학 강의를 하다 보면 수강자 중 간간이 성 평등을 위한 더 이상의 여성에 대한 적극적 조치는 역차별이라고 한다. 심지어 동료 법학자 중에는 인권으로 사람답게 살 권리를 보장하면 될 것을 굳이 여성 인권이어야 하느냐는 질문을 하기도 하고 ‘과연 여성은 사회적 약자인가’라는 반문을 하기도 한다.

  자, 인권이면 될 것을 굳이 여성 인권이어야 하는가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인권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 권리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람답게 살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보편적 권리이다. 이렇듯 인권은 보편적임과 동시에 현실적으로 사람답게 살 권리를 침해받고 있는 사회적으로 취약한 사람을 위한 권리이기도 하다. 이렇듯 인권은 보편성과 특수성을 동시에 고려한다. 따라서 당연히 사회적 약자의 인권이 바로 인권이다. 그래서 ‘장애인 인권이 인권이다, 아동 인권이 인권이다, 노인 인권이 인권이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독 여성 인권이 인권이라고 하면 많은 이들이 의혹의 시선을 보낸다. 여성이 소수자냐 약자냐 하면서 말이다.

   남성과 여성을 중심으로 성별화 된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만큼 다수를 차지한다. 얼핏 보면 여성은 남성보다 약할지언정(으레 약해야 한다) 소수는 아니다. 그런 까닭에 여성은 남성보다는 사회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다면(으레 불리한 위치여야 한다) 사회적 약자이다. 그러나 소수자는 아니라고들 한다. 하지만 소수자란 특정 집단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차별받고 자신이 특정 집단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여성은 남성의 몸이 아니라는 이유로 (남성의 몸이 아닌) 특정 집단에 속해 (남성의 몸이 아니라는) 그 이유로 차별을 경험하는 이들이다. 따라서 여성은 소수성을 경험하는 소수자이기도 하다. 더욱이 많은 여성들은 사적 공간에서 다양한 문화적 환경과 사회적 신분으로 지극히 개별적으로 생활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성과 여성 간의 차이는 남성과 여성 간의 차이만큼이나 혹은 그보다도 더 다양하다. 그런 까닭에 여성과 여성 간의 차이는 여성이란 범주로 일반화할 수 없음에도 다수를 차지하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성 각자의 소수성은 쉽사리 무시된다.

  따라서 여성은 남성보다 사회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는 사회적 약자이기도 하나 여성은 남성의 몸이 아니라는 이유로 특정집단에 속해 그로 인한 차별을 인식하고 있는 사회적 소수자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여성이 마냥 사회적 약자이거나 사회적 소수자이지만은 않다. 여성은 다양한 차이와 존중을 현실적으로 실감하기에 비단 이랬다저랬다 종잡을 수 없는 종속이라는 불신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각자에게 그의 몫을 주장하며 여성에 대한 차별이 곧 인간에 대한 폭력임을 지속해서 밝혀내고 있다.

  1996년에 제정된 「여성발전기본법」이 2015년에 이르러 「양성평등기본법」으로 전부 개정됐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비록 성 평등이 아닌 양성평등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애당초 여성을 위한 평등이 비단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성을 비롯해 ‘인간’을 위한 것이라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익히 ‘여성 인권이 인권이다’를 알 수 있다.

  버틀러의 말대로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인간이 돼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세상은 나를 어쨌든 여성이라고 한다. 심지어 약자라고 소수자라고도 한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인간이 돼야 한다는 말인가.

  과연 나는 나인가, 당신은 당신인가, 아니면 나도 당신도 ‘어쨌든 여성’이란 말인가. 누가 왜, 나를, 당신을 ‘어쨌든 여성’이라고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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