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칼럼] 차브, 그리고 우리 안의 인종주의
[교수칼럼] 차브, 그리고 우리 안의 인종주의
  • 윤희철 영어영문학과 교수
  • 승인 2017.12.05 17: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근 한국인에 대한 증오범죄들이 뉴스에 등장하며 우려와 공분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생각 하는 영국에서도 길을 가던 한국인 유학생이 특별한 이유 없이 인종차별적 조 롱과 함께 집단 폭행을 당했고, 유명 한 국인 프로축구선수도 경기장에서 상대 팀 서포터들에게서 인종차별적 야유를 받았다. 영국의 주류 언론은 늘 인종주의적 범죄나 일탈은 용납될 수 없으며, 이것이 결코 영국 사회 전체의 의사를 대변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그러 나 인종증오 범죄를 자행하는 집단이 중산층이 아니라 주변부에 속하는 소수라 하더라도, 브렉시트 통과 이후 영국 사 회에서 그 어느 때보다 인종차별적 태도가 팽배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영국을 비롯한 서구 사회에서 나타나 는 인종차별주의의 기저에는 제노포비 아(xenophobia), 즉 외국인 혐오의 정 서가 깔려있다. 고전 그리스어에서 제 노(ξένος)는 낯섦 또는 이방인을 뜻하고, 포비아(φόβος)는 공포를 뜻한다. 따라서 어원적으로는 인간이 낯선 상대에 대해 본능적으로 갖는 두려움을 의미하는 합성어지만 최초에는 아고라 포비아(agoraphobia), 즉 광장 공포증 이라는 의미로 사용됐다고 한다. 제노포비아가 타인종과 그들의 문화에 대한 이질감과 두려움에서 집단적 혐오와 증오의 정서로 변이되는 과정에는 다양한 정치적·사회적 기제들이 개입됐다.

  영국 사회에서 인종차별적 행태를 가 장 공공연하게 표출하는 집단은 흔히 차브(chav)’라고 불리는 하층계급과 그 들의 자녀들이다. 미디어에서 정형화된 차브는 공공임대주택에 거주하면서 노 동을 하지 않고 복지 예산만 축내는 일종의 사회적 식객으로, 과도한 금속 장신구와 가짜 유명메이커 운동복으로 치 장한 교양 없고 폭력적 성향을 지닌 집단이다. 흔히 중산층과는 별개의 인종으로 취급받으며 희화와 조롱의 대상이 자 각종 사회문제의 근원으로 낙인 찍혀있다. 그러나 인종차별의 주체인 동 시에 객체인 차브는 태생적으로 비이 성적이고 반사회적인 집단이 아니라, 1980년대 이후 대처리즘과 신자유주의 의 물결 속에 고용불안정과 무한경쟁의 희생양이자 양극화의 극단으로 내몰린 영국 노동계급의 퇴행적 모습이다. 공 교육의 황폐화와 복지의 축소로 인해 사실상 계층상승의 기회가 봉쇄된 이들 에게 저임금 노동시장에서 경쟁하는 비숙련 외국인 이주자들은 공존할 이웃이 아니라 생존을 위협하는 타도의 대상일 뿐이다.

  차브 논란을 통해 최대의 수혜를 받은 집단은 영국의 극우 정치인들이었다. 이들은 차브의 반사회성을 공격하면서 복지 예산 삭감의 정당성을 선전했고, 차브의 인종주의적 증오를 영국다움의 복 원으로 치환했다. 그 결과 2014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극우 정당인 영국 독립당이 제1당을 차지했고, 2016년에는 보수당 강경파가 주도하는 브렉시트가 국민투표를 통과해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가 결정됐다.

  영국과 마찬가지로 한국 사회도 IMF( 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이후 급격한 양 극화로 인한 빈곤의 고착화를 경험하고 있다. 특히 기본적인 사회안전망조차 미비한 상태에서 안정적 취업을 통한 계층 상승의 기회마저 뺏기고 무한경쟁에 내 몰린 젊은 세대들의 좌절과 절망의 골은 너무도 깊다. 이런 사회적 배경 속에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인종 혐오적 분위기 는 점차 고조되고 있으며, 차브에 비해 극우의 이념적 색채가 보다 농후한 일간베스트 등과 같은 극단적이고 반사회적인 하위문화를 표출하는 집단이 등장 했다. 이들은 외국인 노동자는 물론 여 성, 동성애자 등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들을 집단으로 린치를 하는 가학적 일탈 을 보인다. 그러나 그들 또한 우리사회 에서 낙인찍히고 고립된 소수이며 진보 적 담론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무차별 적 증오와 비이성주의를 확산시킬 뿐이 다. 영국과 한국 사회 모두 무한경쟁을 통한 양극화의 고착은 인종차별과 사회 적 증오의 비옥한 토양이며 극단적 정치 세력에게는 최적의 먹잇감이다. 지난겨울 매서운 한파를 뚫고 우리 모두가 광장에서 들었던 촛불의 의미도 결국 양 질의 일자리가 창출되고 사회적 이동성 과 역동성이 복원되며 보편적 사회안전망의 확충을 통해 사회적·경제적 양극화가 완화된다면 비로소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도봉구 삼양로144길 33 덕성여자대학교 도서관 402호 덕성여대신문사
  • 대표전화 : 02-901-8551, 8558
  • 청소년보호책임자 : 고유미
  • 법인명 : 덕성여자대학교
  • 제호 : 덕성여대신문
  • 발행인 : 김건희
  • 주간 : 조연성
  • 편집인 : 고유미
  • 메일 : press@duksung.ac.kr
  • 덕성여대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덕성여대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ress@duksung.ac.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