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보는 덕성 100년사]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2020년이 덕성학원 100년인 까닭은?
[미리 보는 덕성 100년사]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2020년이 덕성학원 100년인 까닭은?
  • 한상권 덕성 100년사 편찬위원장
  • 승인 2018.03.21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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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대학의 장점, 만족스러운 점은?

  2014년에 창학 94주년을 맞아 덕성여대신문사가 <우리대학의 장점, 만족스러운 점>을 묻는 설문(이하 덕성여대신문사 설문)에, ‘오래되고 자랑스러운 역사’가 ‘아름다운 캠퍼스’와 ‘좋은 교육프로그램’에 이어 세 번째로 꼽혔다. 학생들은 독립운동가 차미리사 선생의 이념이 깃든 우리대학과 곧 창학 100주년을 맞이할 우리대학의 오랜 역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반면 덕성여대신문사 설문에 따르면 ‘우리대학이 조선여자교육회의 여자야학이 설립된 1920년 4월 19일을 창학일로 해 올해로 창학 94주년을 맞는다’는 사실을 아는 학우는 32%에 그쳤다. 학생 열 명 가운데 일곱 명은 덕성학원이 ‘언제’, ‘어떤’ 정신으로 설립됐는지 잘 모르는 것이다. 학생들은 차미리사 선생(1879~1955)이 덕성학원을 세운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왜’ 자랑스러워해야 하는지는 모르고 있는 셈이다.

  3·1 운동의 아이콘이 된 유관순 열사
  오늘날 3·1 운동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인물은 ‘조선의 잔다르크’라 불리는 유관순(1904~1920) 열사다. 하지만 유관순 열사는 3·1 운동 당시는 물론 일제강점기 내내 대중에게 생소한 ‘미지’의 인물이었다. 박은식(1859∼1925)이 3·1 운동의 결과물로 지은 독립운동 역사서인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는 부녀자에 대한 일제의 만행이 서술돼 있지만, 유관순으로 보이는 인물에 대한 기술은 없다.

  미지의 인물이었던 유관순 열사가 대중의 시야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해방이 된 이후다. 유관순 열사는 1946년 10월경 처음으로 알려져, 이화여자중학교(현재 이화여자고등학교)를 중심으로 기념사업회가 조직됐다. 그를 알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은 이화학교 교장 신봉조인데, 그 역시 해방 이전에는 유관순을 전혀 몰랐다. 그에게 유관순이라는 인물을 처음 알려준 사람은 유관순의 학교 선생이었던 박인덕이었다.

  사회자 : 신 박사님은 어떻게 유관순을 알리게 되었나요?
  신봉조 : 박 선생님(박인덕: 필자)이 그때 말씀, 그게 시초가 되어, 나는 유관순 말도 못 들어봤어. 이화학교 교장이면서.…
  신봉조 : 박인덕 선생님은 유관순을 알린 유일한 사람이예요. 스승과 제자니까 알 수 있었구요.
<출처/정상우 <역사와 현실> 중 「3·1운동의 표상 ‘유관순’의 발굴」>


  박인덕은 이화 출신으로 유관순이 이화학당 재학 중 교편을 잡고 있었다. 3·1 운동에 가담해 서대문 형무소에 복역하던 중 유관순을 접하고 그의 행적을 알게 돼, 해방 직후 이를 이화여자중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던 신봉조에게 전했다. 이후 유관순 열사는 기념비와 전기, 영화, 노래, 시, 교과서 등을 통해 한국 사회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여성 독립운동가가 됐다. 만세 과정에서 부모의 죽음, 체포와 고문, 옥중투쟁과 순결한 죽음 등으로 인해 일제 식민통치의 잔혹함을 폭로하는 상징적 인물이 된 것이다. 특히 ‘유관순 = 3·1 운동’이라는 등식이 성립할 정도로, 그는 우리 민족 최대의 독립운동인 3·1 운동의 기억을 독점하고 전유(專有)하는 인물이 됐다. 일제시대 친일행각을 벌였던 신봉조나 박인덕이 해방 직후 유관순을 적극 발굴한 까닭은, ‘이화’라는 연결고리를 통해 그를 현양함으로써 자신들의 ‘친일’ 과거에 대한 면죄부를 받고자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 결과 유관순 열사는 3·1 운동을 계획·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민족대표 33인을 뛰어넘는 3·1 운동의 대표적 표상이 됐다. 하지만 3·1 운동 직후 조선여자교육회를 설립해 여성해방과 남녀평등 운동을 벌인 독립운동가 차미리사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3·1 운동과 조선여자교육회
  1919년, 인도와 정의를 지도이념으로 삼은 3·1 운동이 일어나자 조선에도 민족적 각성이 촉진되면서 ‘개조’의 기운이 사회 전반에 충만했다. 이 가운데 사람의 정신을 개조하자는 사회개조론자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사람의 정신을 개조하는 방법으로 교육을 강조했다. 개조론에 힘입어 새롭게 대두된 교육운동 가운데 하나가 소외된 여성을 위한 여성교육기관 건립 운동이었다.

  1912년, 미국에서 귀국한 후 배화학당 사감과 교사로 있었던 차미리사 선생은 3·1 운동이 발발하자 본격적으로 여성교육을 실시할 목적으로 종로구 도렴동에 있는 종다리(宗橋) 예배당의 종 집을 빌려 야학을 열었다. 이는 1919년 9월의 일로, 그의 나이 41세 되는 해였다.

 

 

▲ 3·1 운동 직후 차미리사 선생이 처음 여성야학을 시작한 종다리 예배당. 출처/한국역사연구회


  차미리사 선생은 낮이면 배화학당 사감으로 근무하고 밤이면 코 흘리는 종종머리(끝을 모아 땋아서 댕기를 드린 머리) 여자아이, 소박데기 젊은 부인들을 모아 놓고 자정까지 가르쳤다. 차미리사 선생은 거족적 민족운동인 3·1 운동이 발발한 해가 저물기 전인 음력 섣달 그믐날(양력 1920년 2월 19일) 조선여자교육회를 발기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덕성학원의 뿌리다.

  차미리사 선생이 3·1 운동 정신을 계승해 설립한 조선여자교육회는 양성평등을 통해 문명화된 사회를 건설하려 한다는 점에서 ‘조선 사회의 희망’이었으며, 여성의 완전한 해방과 행복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조선 문명의 맹아’였다. 조선 여성의 참담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창설된 조선여자교육회는 다음 몇 가지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첫째, 조선 최대의 민족운동인 3·1 운동을 계승해 조직된 여성교육기관이라는 점이다. 조선여자교육회의 창립은 19세기 말의 교육 구국운동의 전통을 계승하는 것인 동시에 1920년대 민족 교육운동을 선도하는 것이었다.

  둘째, 여성 스스로의 힘으로 세운 여성 교육기관이라는 점이다. 3·1 운동 직후 순전히 여자의 손으로 여자의 교육을 위해 교육기관을 경영하는 일은 조선여자교육회가 처음이었다. 조선여자교육회는 지식, 금전, 권력 어느 것 하나 갖지 않은 한 여성이 ‘남녀평등은 교육 평등으로 이뤄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세운 자립적·자생적·자각적 여성 교육기관이었다.

  셋째, 교육의 기회로부터 소외된 가정부인을 교육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차미리사 선생은 배움의 기회로부터 소외된 이들에게 교육의 혜택이 먼저 돌아가야 한다는 대중교육론을 견지했다. 조선에는 교육이 필요하되 여성 교육이 필요하며, 여성 교육 중에서도 교육 적령기를 넘긴 가정부인을 교육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넷째, 3·1 운동 이후로도 대중과 호흡하면서 진보와 발전을 거듭한 교육단체라는 점이다. 3·1 운동의 영향으로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청년단체들이 1921년에 들어 이미 유명무실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이와는 달리 조선여자교육회는 조선교육회, 민립대학본부와 더불어 조선 교육 운동을 대표하는 3대 조직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여성해방의 제일보로 여성 교육을 주장하면서 창립된 조선여자교육회는 식민지 암흑시대를 비추는 ‘조선의 한 줄기 광명’이며, ‘조선의 자랑이고 감격’이었다. 조선여자교육회장 차미리사 선생은 ‘교육사업에 독단적으로 종사해 성공한 최초의 조선 여성’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조선여자교육회는 1920년 4월 19일, 종다리 예배당에서 부인야학강습소를 열었다. 조선여자교육회 산하에 설립된 부인야학강습소는 3·1 운동 이후 등장한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이었다. 이후 부인야학강습소는 청진동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근화여학교로 성장했다. 덕성여대는 조선 여성의 힘으로 여성교육을 시작한 1920년 4월 19일을 개교기념일로 삼아 기리고 있다. 덕성여대는 여성독립운동가가 3·1 운동 정신을 계승해 설립한 유일무이한 민족사학이다.

  우리 대학의 단점, 불만스러운 점은?
  덕성여대신문사 설문에는 “우리 대학의 단점, 불만스러운 점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도 있었는데, ‘미흡한 대학 홍보’가 1위를 차지했다. 학생들은 “대학의 본래 이미지와 홍보 이미지가 조화롭지 않아요”라고 답했다. 이와 관련해 최근 우리대학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올라온 <100년의 덕성이 묻혀간다>라는 글이 눈길을 끈다.

  곧 저희 학교 100년입니다. 이렇게 길고 뜻 깊은 역사를 가진 학교임에도 불구하고 저희 학교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나이 많으신 분들만 아시지요. 제 친구들은 제 대학교 이름 이야기 하면 전문대냐고 지방에 있냐고 물어보기까지 합니다.(……)학교와는 전혀 관련 없는 새싹 이런 걸로 홍보하고 학교홍보에 열을 올리지 않는 홍보처의 활동을 보며 매우 실망했습니다.
<출처/덕성여대 홈페이지 자유게시판 (se**********, 2017.12.20.)>


  대학의 홍보가 턱없이 부족할뿐더러 홍보 내용 또한 번지수를 한참 잘못 짚고 있다는 지적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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