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에게>
이 세상에는 두 개의 세계가 있다. 내가 딛고 서 있는 두 발 아래의 세계와 내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세계. 믿기 어렵겠지만 이것은 진실이다. 내가 사는 세계에는 내가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세계에도 내가 있다. 미친 것 같겠지만 이것 또한 진실이다.
그러니까 이해하기 쉬운 개념을 빌려 말하자면,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가 있고, 그곳에는 나의 도플갱어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이름도, 외모도, 성격도 나와 똑 닮은 사람이. 나는 이런 판타지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를 아주 어릴 적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미지의 세계와 그곳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는 어린 아이들 사이에서 자주 불려나오는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였다. 유치원에서 아이들이 전래동화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대해 조잘거릴 때마다 선생님들은 퍽 난처한 얼굴을 지으며 다른 주제로 관심을 돌리려고 애쓰고는 했었다. 시간이 흘러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야 선생님들이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알게 되었다.
두 세계는 만나지 못한다.
아니, 만나서는 안 된다. 도플갱어끼리는 만나면 죽는다는 이야기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 괴담이 아주 허풍은 아니었나 보다. 어느 곳에나 전설을 동경하고 모험을 선망하는 이들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또 다른 자신을 찾으러 나갔던 사람들은 며칠 뒤 집으로 돌아왔고, 곧 사망했다. 여정을 떠났던 모두가 그랬다.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한 명도 빠짐없이 자살이었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퍼져나갔다. 몇 차례의 죽음이 있고 나서부터는 모든 사람들이 약속한 듯이 침묵하기 시작했다. 애초부터 다른 세계와 다른 나 같은 것은 없었다는 것처럼.
띠르르르릉. 띠르르르릉.
잠시 벽 귀퉁이에 기대어 눈을 붙인 지 15분이 채 되지 않아 알람이 울린다. 이 시간에는 일어나야 아르바이트에 늦지 않게 도착한다는 신호이다. 물에 푹 담가진 솜처럼 유난히 몸이 무거운 날이었지만 별다른 선택지가 없기에 또다시 몸을 일으켰다. 가야지, 돈 벌러.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선택의 자유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제는 이 사실이 익숙해서 별로 슬프지 않다. 다른 이들의 평범을 탐하지 않는다. 19년 동안 한 번도 가진 적이 없던 것을 탐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이 거지같은 현실 속에서도 꿈이라는 것은 무엇이기에 내가 나를 포기하게 두지 않는 것일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그나마 믿고 붙잡을 만한 것이 있다면 그건 꿈이었다. 참 질기기도 하지, 이 상황 속에서도 소망을 갖고 미래를 그리게 하는 것은 참 잔인하고 아름다웠다. 일이 바빠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엄마아빠, 학교가 끝나면 줄줄이 잡혀있는 아르바이트를 등에 잔뜩 지고 보일러가 고장나 차가운 방바닥에 몸을 뉘여도, 세상을 누비고 다니는 나를 상상하면 그래도 편히 잠들 수 있었다. 작은 집을 벗어나 큰 세계무대의 중심에 서 있는 외교관이 되고 싶었다. 외교관 정하나, 외교관 정하나. 수도 없이 되뇌었다.
어느 날부터인지 잠을 자면 꼭 꿈을 꾸었다. 원래 같았으면 지쳐 잠들었기에 꿈도 꾸지 않고 완전히 곯아떨어졌을 텐데, 이상한 일이었다. 꿈을 꾸기 시작한 지 일주일쯤 지났을 때, 나의 꿈에 매번 등장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지만 꿈에서 그 애를 거듭 만날수록 나의 의심은 점차 확신이 되었다. 나와 같은 생김새, 같은 눈빛, 같은 표정.
나는 또 다른 나를 꿈속에서 마주한다.
몽중 무단침입자가 다른 세계의 나라는 것은 직감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애 말고는 가능성이 없었다. 그의 정체를 알고 난 이후 처음 그 아이를 보고 들었던 생각은, 무섭다. 도플갱어 괴담이 생각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꿈에서 만난 것도 만난 것으로 쳐주나? 아무튼.
한동안 꿈에서도 경계를 풀지 않았다. 저 애가 나를 어떻게 해코지 할지 몰라. 남의 꿈에는 대체 왜 마음대로 매일 나오는 것인지 불만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이런 나의 마음이 그 아이에게도 전해졌는지 그는 꿈에서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주 조용히, 가만히 앉아 나의 감긴 눈 뒤편을 묵묵히 응시할 뿐이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곧 수일이 지났다. 그즈음 되니 그 애가 내 꿈에 들어와 아예 자리를 잡은 것이 거슬리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익숙하게 앉아있는 아이. 익숙한 고요. 익숙한 응시. 오히려 이제는 그 애가 있어 평화롭다고 느낄 지경에 이르렀다.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역시, 내 인생에 있어 순탄한 것이 있을 리가 없다. 그 아이는 평소처럼 나를 바라보다가도 새로운 표정들을 언뜻언뜻 비추었다. 빌어먹게도, 나는 그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았다. 거울 속에서 매일이고 보는 얼굴이고, 표정이다. 모르는 것이 더 어려웠다. 그 애는 내게 뭔가를 말하고 싶어했다. 나는 나를 외면할 수 없었다.
용기를 내어 너에게 다가간다.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너의 표정. 결국 내가 너에게 다가가리라는 것을 예상했다는 듯 짓는 옅은 미소가 얄미웠다. 한쪽 눈썹을 올려 살짝 가자미눈을 뜨자, 그 애가 나에게 무엇인가를 내밀었다. 나는 홀린 듯이 그것을 받아들었다. 어느새 내 손에는 작은 쪽지가 쥐어져 있다.
이게 뭐야? 주소? 이건 이메일 주소 아니야?
나는 무의식적으로 이메일 주소같이 생긴 것을 눈에 꼭 새겨 넣었다. 깨어나서도 기억해야만 할 것 같았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외우려고 주소를 중얼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잠에서 깬 나는 침대에서 튀어나오듯 일어나 책상으로 향했다. 꿈속에서 중얼거리던 이메일 주소를 재빨리 아무 종이에 휘갈겨 적었다. 다 적고나서야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종이 위에 아무렇게나 날아가는 글씨들을 바라보는 데 이게 이메일 주소라고 하기엔 한 번도 본 적 없는 도메인이었다. 정말 유효한 주소일까? 순간 모든 것이 거대한 허구이고 나는 그 안에서 그 애에게 놀아나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 묘했다. 하지만 살면서 이정도로 강한 이끌림을 느껴본 적이 없던 나였기에 이 모든 상황이 아이의 못된 장난이라고 해도, 한 번쯤은 놀아나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컴퓨터 전원을 켰다.
받는 사람 칸에 주소를 입력하고 한참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뭐라고 써야 할지 모르겠어서 창을 띄워 둔 채 모니터를 째려보았다. 영겁의 시간이 흐르고 결국 한 자 한 자 힘겹게 써내려간 나의 첫 이메일은.
안녕.
정말 너야?
일주일이 지나도, 이 주일이 지나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하며 자조하는 마음과 나를 진짜로 가지고 놀았다는 괘씸함이 한 데 뒤섞여 덩그러니 남겨졌다. 답장이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받은 메일함을 열어볼 때면 스스로가 우스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날은 이제는 정말 그만 기대해야지 하고 다짐한 날이었다. 신기한 경험을 했다 치고 꿈속에서 본 그 애를 기억 저편에 묻어두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작별인사를 하는 마음으로 메일함을 열었다.
단언컨대 내 생에 그토록 심장이 터질 듯 뛰었던 적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정하나 10.04
<제목: 하나야 안녕. 답장이 늦어서 미안해. 내가 사정이 있어서...>
떨리는 손으로 마우스를 잡으면 커서도 같이 떨린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발신자 정하나로부터 온 메일을 조심스럽게 클릭했다.
보낸사람 wjdgksk@&&**///.com
받는사람 hanajung0714@Jmail.com
하나에게
하나야 안녕. 답장이 늦어서 미안해. 내가 사정이 있어서 답장이 너무 늦어버렸어. 첫 편지부터 변명이라니, 나 정말 최악이다. ᅲ 먼저 내 멋대로 네 꿈에 쳐들어간 거 사과할게. 많이 놀랐지? 하지만 내가 너에게 닿을 수 있는 방법이 그거 밖에 없었어. 용서해주라. ᅲᅲ
우리 앞으로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아. 그러니 이쯤에서 첫 편지는 이쯤에서 마무리할게.
답장 꼭 해!
- 하나가 -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 메일을 읽고 또 읽었다. 내용을 안 보고도 줄줄 읊을 수 있을 때까지 읽었을 때 비로소 이것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상황임을 실감했다. 편지가 도착했다. 다른 세계에서. 또 다른 나로부터.
흥분되는 마음을 간신히 붙잡고 답장으로 무슨 말을 적어야 할지 떠올리기 시작했다. 팝콘이 옥수수 알갱이에서 터져 나오듯 정제되지 않은 질문들이 머릿속에서 마구잡이로 튀어 올랐다. 너는 나를 어떻게 알았어? 네가 사는 곳은 어떤 곳이야? 대체 내 꿈속으로는 어떻게 들어온 거야? 당장이라도 묻고 싶은 것이 쏟아져 나왔지만 이내 흥분을 가라앉히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조급해하지 말자고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하나의 말대로 앞으로 우리가 할 이야기는 많았으므로.
또 다른 하나와의 편지 놀이는 한 달 정도 계속되었다. 이메일을 주고받는 간격은 짧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간 충분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시시콜콜한 일상부터 조금은 심각한 대화들까지. 하나는 내가 살고 있는 세계와 본인이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해, 그리고 우리에 대해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세계는 너희 세계랑은 좀 달라. 우리는 기본적으로 너희에게 관심이 많아. 그래서 너희 세계와 닿을 수 있는 방법을 많이들 연구하고 있어. 운이 좋게도 나와 친한 연구원 중 한 명이 꿈을 통해서 또 다른 나와 연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거지. 아직 공식적으로 인정된 연구는 아니고 계속 실험 중이라 다른 사람들은 이런 방법이 있다는 것을 잘 몰라. 내가 걔의 첫 번째 실험체로 기꺼이 나서 준 거야. 그리고 다행히도 성공해서 너의 꿈속에 들어갈 수 있었던 거지. 그 연구원이 말해줬는데, 내가 너의 꿈속으로 들어가는데 성공했다는 것은 너와 내가 어느 정도 연결이 되어있다는 뜻이래. 아직 그 연결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밝혀진 바는 없지만 나는 너와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참 마음에 들어.
두 세계에 대해 거의 무지한 내가 질문을 던질 때마다 하나는 신이 난 아이처럼 이메일에 조잘조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글에서 마치 잔뜩 상기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 애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대체로 흥미로웠는데, 그중 나의 뇌리에 박힌 이야기는 아무래도 이것이었다. 하나의 말에 따르면 이름도, 성격도, 생김새도 같은 사람이 이 세계에 한 명, 저 세계에 한 명 살고 있다. 마치 나와 하나처럼 말이다. 여기까지는 나도 아는 이야기이다. 내가 새롭게 알게 된 것은 무엇이었냐면 이 둘이 처한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가난하던 나와 가난이라는 것을 모르고 자랐다는 하나. 나에게 아무 관심 없는 부모님과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하나. 어쩐지 이메일을 주고받으면 주고받을수록 나만 비참해지는 기분이었다. 남이 가진 것을 부러워한지가 언제인지도 까마득할 만큼 체념하고 살았던 나였는데. 그게 나의 생존 방식이었는데 정말 오랜만에 질투와 원망이라는 거센 감정들이 내 안에 아직 살아있음을 확인했다.
믿지도 않는 신을 향해 비아냥거렸다. <왕자와 거지> 이야기를 얼마나 감명 깊게 읽으셨길래 이렇게 인간들을 가지고 장난치는 겁니까. 그리고 이왕 역할을 주시려거든 저한테 왕자 역할을 주시면 좀 좋습니까?
내가 보낸 마지막 이메일 이후로 거의 한 달이 흐르고 있는데도 하나에게서 답신이 오지 않았다. 원래 답신이 오기까지 이정도의 시간이 걸린 적이 없었는데, 괜히 그 애에게 무슨 일이 있나 걱정이 되었다. 딱히 할 것은 없었지만 이메일 창을 닫지 못하고 괜히 이것저것 클릭해보았다. 마우스 위에 얹은 손이 시렸다. 벌써 겨울이 왔네. 너도 겨울을 싫어할까? 너와 내가 정말로 연결되어 있다면 내가 네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네가 알았으면 했다.
그렇게 겨울이 오는 것을 바라보며 얼마의 시간을 더 흘려보냈을까, 오랜만에 하나로부터 이메일이 도착했다.
보낸사람 wjdgksk@&&**///.com
받는사람 hanajung0714@Jmail.com
하나에게
하나야 오랜만이야. 시간이 없어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게.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알아왔어. 꿈도 편 지도 아닌 진짜 현실에서 말이야. 어쩌면 우리 생에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 될 지도 몰라.
장소: OO시 M면 N로 73-11
이곳으로 12월 31일 밤 11시까지 나오면 돼. 꼭 만날 수 있기를 바라.
- 하나가 -
추신. 답장은 안 해도 돼. 내가 너랑 이메일을 주고받는 걸 부모님한테 걸리고 말았어. 아마 이게 내 마지막 편지가 될 것 같아. 그럼 그날 보자.
처음에는 당황했고, 조금 지나고 나서는 황당했고, 이후에는 머리가 아파왔다. 이 아이와 엮이고 난 후로부터 모든 것이 예측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것은 정도를 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 만나자고? 하나는 도플갱어끼리의 만남에 얽힌 괴담에 대해 모르고 있는 것일까? 아니 그보다도 내가 그곳에 갔을 때 하나가 아닌 다른 사람이 생뚱맞게 서 있으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휴대폰을 켜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12월 30일. 하나가 만나자고 한 날짜는 당장 내일이었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날들을 살아오며 쌓은 나의 모든 경험과 지식이 내가 그곳에 가는 것을 말리는 듯했다.
아무래도 나는 답이 없는 인간인가 보다.
나는 지금 가고 있다. 그곳으로.
하나와의 약속 장소로 가는 동안 너무 긴장했던 탓일까. 평소에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내가 지하철을 거꾸로 타다니. 만나기로 했던 시간보다 벌써 30분이나 지나 있었다. 하나가 기다리다가 내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벌써 돌아갔으면 어떡하지? 조급해지는 마음에 자꾸만 시간을 확인했다.
지하철에서 내려서는 지도가 알려주는 길을 따라 미친 사람처럼 뛰었다. 심장이 귀에 달린 것처럼 쿵쿵대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는데, 이게 뛰고 있어서 그런 것인지 긴장되어서 그런 것인지 구분이 가질 않았다. 목적지에 거의 도착했을 즈음, 잘 정돈되지 않은 짧은 풀들로 뒤덮여있는 언덕이 하나 나왔다. 여길 올라가면 되는 걸까 생각한 순간 언덕 위에서 움직이는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꽤 먼 거리여서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애도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하나와 거리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긴장이 극도로 심해져 손이 점점 차가워졌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편안해짐을 느꼈다. 그 아이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나는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다른 세계의 나.
또 다른 나.
지금 생각하면 로봇처럼 경직되어있던 내 모습이 꽤 우스웠을 텐데, 다행히도 나만 그랬던 것은 아니었던 듯싶다. 우리는 한동안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인사도 잊은 채 서로를 신기한 듯 빤히 쳐다보았다. 눈, 코, 입 모두 꼼꼼하게 뜯어보았다. 틀림없는 나였다.
“안녕. 하나야. 나 네가 정말 보고 싶었어.”
하나가 먼저 정신없는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내 목소리를 듣는 게 어색했다.
“안녕. 나도 너를 매일 상상해왔어. 우리 생각보다 더 많이 닮았구나.”
거울을 보고 얘기하는 것만 같은 기분에 삐걱거리며 말을 꺼내자 하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30분이나 늦어서 미안해. 내가 지하철을 반대로 타는 바람에 그랬어. 어째서 이 시간까지 기다린 거야? 이 정도 늦었으면 그냥 포기하고 갈 법도 한데.”
“나는 네가 이곳에 어떻게 해서든 올 걸 알았거든. 우린 하나잖아.”
하나가 알쏭달쏭한 대답을 내놓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이 미소를 본 적이 있다. 꿈속에서 자신의 이메일 주소가 적힌 쪽지를 내게 건네주던 그때였던가.
인사를 마친 우리는 언덕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나야. 응. 그런데 어떻게 여기에 올 수 있었던 거야? 우린 사는 세계가 다르잖아. 세계를 넘어 온 거야? 아, 응.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사실 나도 자세한 건 몰라. 이번에도 나는 전에 말했던 친한 연구원의 첫 번째 실험체가 되어준 거거든. 그래서 오래 있지는 못해. 하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미소 뒤에 아쉬움이 묻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 하나의 얼굴이 곧 내 얼굴이었기에 그런 것들이 너무 잘 보였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니 어떤 말을 해야 이 시간을 후회 없이 보낼 수 있을지 잠시 고민이 되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나는 것일 수도 있는 하나에게 어떤 말을 해주면 좋을까? 사람은 원래 궁지에 몰렸을 때 정체 모를 용기가 솟아 평소에 하지 않을 법한 짓을 한다. 나는 가장 하기 싫었고, 또 가장 하고 싶었던 질문을 꺼내놓기로 했다.
“하나야.”
“응.”
“행복하니?”
내내 미소를 잃지 않고 있던 하나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그 애는 다시 고쳐 웃었지만 끝내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았다. 그것으로 답이 되었다. 씁쓸함이 어느새 두 사람을 휘감고 있었다.
우리는 언덕에서 작별인사를 했다. 서로를 향해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크고 예쁘게 웃어 주었다. 굳이 이야기를 꺼내진 않았지만, 하나도 나도, 이 만남이 우리의 마지막임을 직감했던 것 같다.
집에 돌아와 씻고, 자려고 방바닥에 몸을 뉘였다. 분명 고단한 하루였는데,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아까 본 하나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가 않았다. 하나는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 애가 가진 건 내가 감히 꿈꿔보지도 못하는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흉터처럼 새겨져 있는 슬픔은 나에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나도 그 흉터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으므로.
도플갱어의 괴담이 생각난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모두 가지고 있는 다른 세계의 또 다른 나를 만났을 때. 단순히 결핍된 자가 충만한 자를 만났기 때문에 좌절한 것이 아닐 것이다. 자신이 꿈꾸던 완벽한 버전의 나를 만났음에도 그에게서도 보이는 나의 흉터가 그들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내몰았을 것이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가려지지 않는 흉터를 마주하는 일은 희망의 종말을 불러오기도 한다.
이것은 결국 우리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가지는 슬픔의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미리 알아챈 어른들의 경고인걸까? 어디로 가든 너에게 낙원은 없다는 신의 비웃음일까? 우리가 좌절하지 않고 더 나은 삶을 꿈꿀 수 있도록 쳐놓은 보호막일까?
그러게 내가 그 애를 만나지 말라 하지 않았느냐고, 네가 꿈꾸는 이상은 허상일 뿐이라고 하며 어디선가 혀를 차고 있을 신을 향해 가벼운 조소를 흘리며 일어나 노트북 전원을 켰다. 이제는 익숙해진 이상한 이메일 주소에게 작별을 고할 시간이다. 나는 하나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이 순간은 나의, 그리고 하나의 에필로그이자 새로운 챕터의 프롤로그가 될 터이다.
하나의 이메일 주소를 칸에다 입력하자 그 애가 말했던 대로 주소가 사라졌는지 유효한 사용자가 뜨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해서 키보드를 두드렸다.
보낸사람 wjdgksk@&&**///.com
받는사람 hanajung0714@Jmail.com
하나에게
안녕. 또 나야.
집에는 잘 들어갔니? 그 친한 연구원이 너를 안전히 데려갔길 바라.
이건 네게 보내는 마지막 이메일이 되겠구나.
하나야.
나는 이제 너를 상상하지 않을 거야.
아마 너도 더 이상 나를 상상하며 살아가지 않겠지.
나도, 너도, 괴담 따위에 굴복하지 않을 거야.
우리의 흉터를 지고 더 큰 세상을 향해 나아갈 거야.
나는 나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행복할게.
너도 그래 주겠니?
너도 알잖아. 우린 결국 하나인걸.
언제나 너의 행복을 응원하며,
하나가.
추신.
나는 불편듯이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 희망과 야심이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어디 한번 이렇게 외쳐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자꾸나
한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 이상(李箱) <날개> 중에서 -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에서 가져온 글이야. 우리 세계에서는 엄청 유명하신 분이야!
너에게 꼭 이 글의 조각을 전해주고 싶었어.
글도 글이지만 일단 작가 이름부터가 멋지잖아.
이상(理想)이라니! 정말 허무하고 아름답지 않아?
<제 49회 학술문예상 소설 가작 수상소감>
수필이나 에세이처럼 나의 이야기가 아닌 다른 인물의 이야기를 쓰는 것은 늘 저에게 넘을 수 없는 큰 산과 같았습니다. ‘언젠가는 소설 한 편을 꼭 내 손으로 완성하리라!’라는 기약 없는 다짐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고 있었는데 덕성여대신문사가 주신 좋은 기회를 핑계 삼아 오랜 다짐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성장 소설을 좋아합니다. 누군가는 ‘성장 소설은 청소년을 위한 책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어른들에게 이런 책들이 필요하지 않으냐고 반문하고 싶습니다. 그들의 몸은 성장이 멈췄을지라도 인간은 내적으로 계속하여 성장하는 존재입니다. 요즘에는 성장하는 법을 잊어버린 어른들이 많은 것 같단 생각이 자주 들곤 합니다. 저도 언젠가는 이런 어른이 될지도 모릅니다. 만약 정말 그렇게 된다면 이 글이 저에게 지도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소설은 ‘내가 아무리 더 나은 버전의 나를 꿈꾸어도 그것은 허상일 뿐, 나라는 존재가 가지는 절망의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설정으로부터 가지를 뻗어나갔습니다. 그리고 소설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희망도 꿈도 모조리 한 줌의 재로 만들어버리는 잔인한 세상 속에서도 앞으로 발을 내딛는 사람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더군요. 절망에 대한 이야기를 적고 있으면서도 본능적으로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찾고 있는 저의 모습이 퍽 마음에 들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새카만 어둠 속에서도 빛을 찾아 나가기를.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외칠 수 있는 인간은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일까요.
앞으로 두 명의 하나들은 흉터를 간직한 채로 더 큰 세상을 향해서 나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행복할 것입니다. 그들의 삶이 저의 삶이 되기를, 그리고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제게 주어진 삶을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