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부터 군사정권을 거쳐 민주화 이후까지 한국 언론은 권력과 통제에 끊임없이 맞서 왔다. 이에 한국 언론을 압박했던 검열의 역사와 그 속에서 언론의 자유를 지켜 온 사람들의 발자취를 되짚어 본다.
일제에 통제당한
언론의 자유
우리나라 신문의 역사는 1883년 최초의 근대신문 한성순보의 창간과 함께 출발했다. 1896년엔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이 창간된다. 이후 여러 신문이 생겨났지만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조선총독부(이하 총독부)는 군경을 앞세운 무단통치를 시작하며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를 제외한 모든 한국어 신문을 폐간했다. 반면 일
본인에게는 별도의 법령을 적용해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신문을 발행할 수 있도록 했다.
총독부는 한국인이 발행하는 정기간행물에는 신문지법을, 단행본에는 출판법을 적용했다. 일본인에게는 각각 신문지규칙과 출판규칙을 적용해 차이를 뒀다. 한국인은 신문을 내려면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했으며, 허가를 받더라도 보증금을 내야 해 재정 부담이 컸다. 법을 위반하면 △기사 삭제 △압수 △정간 △폐간 등 행정처분이 내려졌고 언론인은 재판을 거쳐 처벌받을 수 있었다. 출판법은 인쇄 전 원고를 먼저 검열하고 인쇄한 출판물도 배포 전에 다시 검열을 받도록 규정했다.
1920년 총독부는 ‘문화통치’를 내세워 제한적으로 민간신문 발행을 허용했다. 이에 △조선일보 △동아일보 △시사신문 3개 민간신문이 허용됐으나 △지면 통제 △검열 △언론인에 대한 사법처분은 그대로 이어졌다. 1930년대 일본 내 군국주의 체제가 강화되면서 언론 통제는 한층 엄격해졌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이런 환경과 국내 민족 독립운동의 약화로 한국 민간지의 항일 논조가 위축됐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6년 8월 일장기 말소 사건이 일어난다.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 선수가 우승하자 동아일보는 손기정 선수의 유니폼에 그려진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보도했다. 총독부는 이를 문제 삼아 동아일보에 무기정간 처분을 내리고 기자와 화백 등 8명을 구속했다. 이들은 40일만에 다시는 언론 기관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풀려났으며 동아일보는 약 9개월 뒤인 1937년 6월에야 발행을 재개할 수 있었다.
언론 탄압은 사건 이후에도 이어졌다. 1940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강제 폐간되면서 광복 전까지 한국인이 발행하는 민간신문은 자취를 감춘다.
마침내 찾아온 광복,
계속된 언론 통제
1945년 광복을 맞이하며 일제의 언론 통제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들어온 것은 미군정이었다. 미군정은 군정법령 제88호를 발표해 신문·정기간행물 허가제를 시행했다. 신문이나 정기간행물을 발행하려면 당국의 허가가 필요하며 허가 이후에도 당국은 언제든지 발행을 중지시킬 수 있단 내용이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에도 정부는 일제가 남긴 신문지법과 군정법령 제88호를 한동안 유지했다. 6·25전쟁이 일어난 1950년에는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됐고 언론·출판에 관한 특별조치령에 따라 군 보도에 대한 사전검열이 이뤄졌다.
이승만 정부 시기에도 언론 통제는 계속됐다. 신문지법은 제정된지 45년만인 1952년 폐지됐지만 다른 법령을 통한 통제는 남아 있었다. 1958년 개정된 국가보안법은 언론 통제의 도구로 사용됐으며 1959년 4월 30일 경향신문이 군정법령 제88호를 근거로 폐간됐다.
그러나 언론은 정부의 압박에도 권력에 대한 비판을 통해 사회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1960년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다 실종된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자 언론은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발견된 김주열 학생의 모습은 시민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관련 보도들은 부정선거에 대한 비판 여론을 확산하고 4·19 혁명이 일어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듬해 5·16 군사정변으로 언론의 자유는 다시 제약받았다. 군사정부는 언론에 대한 사전검열을 시행했고 같은 해 5월 23일 정부는 ‘신문·통신사 사설기준’을 발표하며 언론계 정비에 나섰다. 그 결과 신문사 76곳이 폐간됐으며 신문과 잡지 1,170종이 정리됐다. 군사정변 이후 체포되거나 재판에 넘겨진 기자는 960명에 달했다. 진보 성향을 표방하던 민족일보는 군사정변 사흘 뒤인 5월 19일 폐간됐으며 관련자 13명이 구속됐다.
이와 같은 탄압에 언론사들도 항의에 나섰다. 1963년 3월 박정희전 대통령이 군정 연장을 발표하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여러 신문사는 군정 연장에 반대하며 15일간 사설 없는 신문을 발행했다.
군사정권 시기에는 법령을 통한 규제를 넘어 편집국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까지 이뤄졌다. 중앙정보부 등 정보기관의 직원인 ‘기관원’이 언론사 편집국에 상주하며 기사 내용과 제목의 크기까지 간섭했다. 이에 맞서 1971년 4월 15일 동아일보 기자들이 한국 언론 최초의 ‘언론자유수호선언’을 발표했다. 진실을 자유롭게 보도하고 정보요원의 신문사 상주 및 출입을 거부하겠단 내용이었다.
이 선언은 5월 초까지 14개 언론사로 번졌지만 정부는 또 다른 통제 수단을 마련했다. 같은 해 12월 6일 박정희 정부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한 뒤 프레스카드제 실시 방침을 통보했다. 프레스카드제는 언론사가 기자 명단을 제출하면 문화공보부가 심사해 보도증을 발급하는 제도였다. 카드를 받지 못한 기자들은 기자직을 떠나야 했고 프레스카드제 시행 결과 전체 기자 수는 6,332명에서 4,269명으로 감소했다.
유신체계와 신군부,
언론 통제의 정점
1972년 10월 17일 유신이 선포되면서 언론 통제는 절정에 달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특별선언을 통해 국회를 해산하고 헌법 일부 조항의 효력을 정지시켰으며 같은 해 12월 27일 유신헌법이 공포됐다. 10월 27일부터 12월 말까지 모든 신문 1면과 7면에는 ‘뭉쳐서 헌정유신, 힘 모아 평화통일’과 같이 문화공보부가 정한 표어가 실렸다.
박정희 정부는 유신헌법에 이어 긴급조치를 발동해 법적 통제 체제를 갖춘 뒤 재판이나 행정 처분을 통한 기자 처벌도 강화했다. 기관원이 다시 각 언론사에 상주하며 취재 과정에 개입했다. 정부는 ‘협조’를 명분으로 각 언론사에 보도지침을 전달해 기사 내용과 보도 방향을 통제했다.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 180여 명은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했다. △신문·방송·잡지에 대한 외부 간섭 배제 △기관원 출입 거부 △언론인 불법연행 거부를 결의한 것이다. 이틀 사이 전국에서 31개 언론사가 동참하며 선언이 확산되자 중앙정보부는 기업들에 압력을 가해 동아일보에 광고를 싣지 못하도록 했다. 이에 동아일보는 같은 해 12월 26일 광고 지면을 비운 채 신문을 발행하는 이른바 ‘백지 광고’ 사태를 맞이하며 큰 재정적 부담을 안게 된다. 그러나 국민들이 동아일보에 ‘격려 광고’를 내기 시작한다. 성금을 내고 싶은 사람들이 동아일보의 광고 지면을 구매한 것이다. 1975년 7월 광고를 정상적으로 내보낼 때까지 동아일보가 실은 격려 광고는 총 1만 351건에 달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다음날인 1979년 10월 27일 계엄이 선포됐고 △언론 △출판 △보도 △방송에 대한 사전검열이 이어졌다. 12월 12일에는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군사반란을 통해 실권을 장악했다. 언론 통제는 새 권력 아래 더 큰 규모로 이어졌다.
1980년 5월 17일 신군부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며 정치인과 재야인사를 대거 연행했다. 한국기자협회 간부 7명도 연행되어고문을 당했고 이중 5명이 구속됐다. 피신했던 김태홍 회장도 곧 체포됐으며 기자협회보는 1년 2개월간 폐간됐다.
언론인들은 검열에 맞서 집단행동에 나섰다. 5월 20일부로 한국기자협회는 군부의 사전검열 거부와 언론 자유 수호를 결의했다. 서울 지역 언론사를 중심으로 검열을 거부하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서울시청에서 검열 업무를 맡던 기자들도 집단 철수했다. 그러나 이들이 검열에 저항한 사실은 지면에 오르지 못해 국민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보도 지침 폭로와
언론 민주화의 움직임
신군부는 개별 기사 검열에 그치지 않고 언론계 구조 자체를 재편했다. 문화공보부는 정기간행물 172종을 폐간하고 군 보안사가 작성한 ‘정화 대상’ 명단을 통해 언론인을 강제 해직했다. 당시 문화공보부 문건에 기록된 해직자는 933명이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선 실제 해직자를 1,000명 이상으로 추정했다. 해직된 언론인 일부는 당시 군이 ‘사회정화’를 내세워 민간인을 강제 수용하던 삼청교육대에 보내졌으며 해직 이후에도 취업에 제한을 받았다.
언론사 통폐합도 이어졌다. 1980년 11월 신군부는 언론 구조 개선을 내세워 전국의 언론사를 강제로 통합했다. 그 결과 전국 64개 언론사가 18개로 재편됐다. 12월 31일에는 정부가 언론사 등록을 취소하고 발행을 정지시킬 수 있는 조항을 담은 언론기본법이 제정됐다. 그러나 언론 통제가 강화될수록 이를 기록하고 공개하려는 언론인들의 움직임도 나타났다.
해직 언론인들은 민주언론운동협의회를 꾸려 언론 활동을 이어갔다. 민주언론운동협의회는 1985년 월간지 ‘말’을 창간했다. 1986년 9월 6일 ‘말’은 특집호를 통해 ‘보도지침 사례집’을 발표했다. 한국일보 김주언 기자가 편집국에서 발견한 보도지침철에서 1985년 10월부터 1986년 8월 사이 문화공보부가 내린 보도 통제 지시 584건을 정리해 공개한 것이다. 보도지침은 정부가 언론에 특정 사건을 축소하거나 지정한 방향으로 보도하도록 지시한 사실을 보여줬다. 언론 통제가 추상적 의혹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문서와 사례를 통해 드러난 것이다. 보도지침 공개는 정부의 언론 통제에 대한 비판을 확산시켰다. 그러나 정부는 그해 12월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소속 언론인들 일부를 구속·기소하며 탄압을 이어갔다.
1987년 언론계에서도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거세졌다. 동아일보는 5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은폐를 폭로하는 특종보도를 냈고 25일에는 동아일보 기자 132명이 ‘민주화를 위한 우리의 주장’을 발표했다. 한국기자협회도 △언론기본법·프레스카드제 폐지 △편집권 독립 명시 △해직기자 복직을 요구했다. 6월 민주항쟁과 6·29 선언을 거치며 같은 해 11월 28일 언론기본법이 폐지되고 정기간행물 등록 등에 관한 법률이 새로 제정됐다. 새 법은 정기간행물 등록 취소를 법원의 재판으로만 할 수 있게 하는 등 정부가 직접 언론을 제재하던 장치를 줄였다. 이 법은 2005년 신문법이 만들어질 때까지 17년간 이어졌다.
오늘날에도 언론의 자유를 둘러싼 문제는 계속되고 있다. 언론이 권력과 자본의 압력에 흔들리지 않고 사실을 보도할 수 있는지, 시민들에게 다양한 관점의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중요한 과제다. 한국 언론 검열의 역사는 단순히 지나간 탄압의 역사뿐만이 아니다. 치열하게 언론의 자유를 지켜 온 시민과 언론인들의 역사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