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을 맞이하고 국가적 안정을 찾은 지 불과 2년도 되지 않은 1947년 3월 1일, 제주도에선 시위와 무력 진압이 이어졌고 한 달 뒤 제주 4.3사건이 발발했다. 해당 사태는 9년간 이어졌으며 약 15,000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에 4월 3일 당시 제주도에서 발생한 일들과 국가적 대응을 알아보고자 한다.
울려 퍼진 총소리
시작된 제주 4.3사건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이한다. 이후 자주적인 국가를 세우기 위해 한반도 일대에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위)가 조직된다. 제주도에서도 1945년 9월 10일 제주도 건준위가 세워지고 인민위원회로 개편된다. 그러나 독립 직후 미군정이 들어서며 대리 통치하게 되고 제주도에 군대가 주둔하게 된다. 미군정은 일제강점기 당시 민간인을 통제하던 경찰과 군인을 주요 보직에 그대로 임명한다. 또한 미군정은 제주도를 도로 승격시키며 경찰 병력을 증진한 다. 광복 이후 징병으로 제주도를 떠났던 6만여 명이 대거 귀환하면서 제주도는 극심한 식량난을 겪는다. 이를 해결하고자 미군정은 미곡 수집 정책을 시행하나 실패하고 많은 도민들이 굶주리게 된다. 해방 이후에도 상황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자 미군정에 대한 도민들 의 반감은 갈수록 커져갔고 이는 갈등의 씨앗이 된다.
1947년 3월 1일, 제주도 3.1절 기념행사에서 시위가 열리고 약 200명의 군중이 모인다. 집회 중 어린이가 경찰이 타고 있던 말발굽 에 차여 다치는 일이 발생한다. 그러나 경찰은 아무런 대응 없이 지나가고 이에 군중들은 분노했고 경찰을 향해 돌을 던지며 대항했다. 점차 몰려드는 군중에 경찰은 총을 발포했고 이로 인해 제주도민 6명이 사망하고 6명의 중상자가 발생한다. 그러나 경찰은 발포가 군중의 습격에 대한 정당방위였다고 공표한다. 경찰의 대응은 제주도 민의 반발을 키웠고 이후 사태를 확산시킨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제주도민들은 발포 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하며 3월 10일 정부를 향한 총파업에 돌입했다. 당시 제주도 내 166개의 관공 서와 민간기업이 파업에 동참했다. 같은 시기 미군정은 한반도에서 단독 총선거를 추진했고 이를 반대하던 사람들은 남조선로동당 제 주도당(이하 남로당)을 꾸려 단독정부 수립과 선거를 반대하는 활동을 이어간다. 남로당은 제주도민 사이 확산된 미군정에 대한 반감을 이용해 집단 무장봉기를 일으킬 준비를 끝마친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경 300명의 남로당 무장대(이하 무장대) 는 12개의 경찰서와 우익 단체 단원의 집을 습격하며 무장봉기를 일으킨다. 당시 남한의 5.10총선거를 앞둔 시점이었기에 군사경찰(이하 군경)은 해당 사건을 더욱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미군정은 총파업을 제주도민의 반감을 증폭시킨 남로당의 선동이라 인식하고 군경을 동원해 본격적인 진압에 나섰다.
강경한 군경의 진압과
늘어나는 무고한 희생
미군정은 사태 발발 이후 경찰 100여 명을 제주도에 급히 파견하 고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는 등 군사력을 강화해 강경진압에 나선다. 오후 8시 이후 통행금지령을 내려 도민들의 이동 또한 통제 했다. 강압적인 진압에 무장대 역시 강력히 맞서며 반발한다. 거세진 시위에 미군정은 국방경비대 제9연대에게 무장대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국방경비대 제9연대 김익렬 연대장(이하 김 연대장) 은 무력 진압에 앞서 무장대와의 평화 협상을 추진한다. 기나긴 설 득 끝에 4월 28일 양측 간의 평화 협상이 성사됐고 72시간 내 무장 전투 중단을 조건으로 합의한다.
그러나 협상 사흘만인 5월 1일, 우익 청년단이 제주읍 오라리를 습격하는 ‘오라리 방화사건’이 일어나며 평화 협상은 결렬된다. 자정 무렵 청년 30여 명이 오라리 연미 마을을 습격해 12채의 집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다. 조사 결과 방화 사건은 무장대가 아닌 우익 청년단원들의 소행으로 밝혀졌다. 김 연대장은 조사 결과를 군정 장관 맨스필드 대령에게 보고했으나 미군정은 김 연대장을 해임하고 4.28 평화 협상을 파기한다.
이후 열린 5.10 총선거에서 전국 선거구 중 유일하게 제주도 내 2개 의 선거구만이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된다. 1948년 8월 15일 미 군정의 통치가 끝난 동시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며 제주 4.3사건 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남북 간 적대적인 관계가 형성됨에 따라 제주 4.3사건은 반역으로 규정돼 제주도민들은 더욱 가혹한 탄압을 받는다.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에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포고문을 발표한다. 포고문은 해안에서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 하는 자는 총살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어 11월 17일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엄령 선포로 군경은 마을에 불을 지르거나 무고한 사람들을 대학살하는 등 무력을 동반한 일명 ‘초토화 작전’을 펼쳤다. 무자비한 군경의 진압은 1957년 모든 무장대원이 사살될 때까지 계속된다.
정부가 숨긴
그날의 역사
제주 4.3사건이 발생한 지 5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진상규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2003년 정부가 발간한 『제주 4.3사건 진상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1960년대까지 제주 4.3사건을 남로당이 주도한 공산군의 반란으로 보고 군경에 의해 피살된 자는 모두 무장대원이거나 동조자라고 여겼다. 더해 제주 4.3사건을 소련이나 북한의 지령에 의해 발생한 공산당의 폭동으로 규정했다.
4.19혁명 이후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며 그간 금기시된 제주 4.3 사건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다. 제주대학교 학생 7명이 모여 결성한 4.3사건진상규명동시회가 최초로 진상규명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5.16군사정변으로 들어선 독재정권이 진상을 밝히기 위한 활동을 탄압한다. 점차 제주 4.3사건은 어떠한 국가적 차원의 조사 없이 잊혀지는 듯했다.
그러나 5.18민주화운동을 계기로 제주 4.3사건 진상규명이 논의되기 시작한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운동으로 민주화의 중요성이 커지며 언론사와 시민단체의 주도하에 제주 4.3사건의 진상규명이 시작됐다. 꾸준한 진상규명 운동 끝에 2001년 1월 12일 제주4.3특별법이 제정돼 국가 차원의 진상조사가 이뤄졌다. 이후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 4.3사건의 유족과 제주도민들에게 정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오래 감춰진
사건의 진실
제주4.3특별법을 제정해 진상 조사를 했지만 여전히 역사를 왜곡하는 시각이 있다. 2023년 태영호 전 국민의힘 의원(이하 태 전 의원)은 김일성의 지시와 북한 중앙당의 개입으로 제주 4.3사건이 발생했다고 발언했다. 이에 제주4.3희생자유족회와 제주4.3평화재단 등 관련 단체는 태 전 의원의 발언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태 전 의원의 발언이 허위사실임을 인정하고 명예 훼손 피해자에게 1천만 원 손해배상을 명했다.
이후 제주 4.3사건을 왜곡하는 발언을 처벌할 수 있는 ‘제주 4.3 왜곡 방지법’이 발의됐다. 현행법인 제주4.3특별법 제13조는 허위사 실을 유포해 제주 4.3사건 관련 단체의 명예를 훼손해선 안 된다고 명시했다. 그러나 해당 법률로는 실질적인 처벌이 어려워 개정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제주 4.3사건을 왜곡하지 않기 위해선 사회문화적 상황을 토대로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이재승 교수 는 “남로당 무장대의 무장봉기만을 제주 4.3사건의 유일한 원인으로 보면 역사를 왜곡할 수 있다”며 “해방 이후 미군정이 들어서며 발생한 민족자결권의 침해와 인접 국가와 활발히 교류했던 제주도의 지리적 특성 등 역사적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고 전했다. 또한 제주 4.3사건을 잊지 않고 오랫동안 기억해야 한다. 제주 4.3 유족 양 윤정(57. 여)씨는 “아직도 찾지 못한 66명의 희생자들이 있다”며 “우리는 진실된 4.3을 후세에게 전승해야 한다”고 말했다. 제주 4.3사건은 많은 민간인이 무고하게 희생된 역사다. 이러한 역사적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는 올바른 역사를 기억하고 후세에 전달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