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강처럼 맵고 쓰게 사는 여자들
생강처럼 맵고 쓰게 사는 여자들
  • 강병진 <씨네21> 기자
  • 승인 2009.07.06 15: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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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지우 감독이 그리는 여성은 대개 욕을 먹는다. 아이에게 수면제까지 먹여 정부와 밀회를 즐기는 <해피엔드>의 최보라는 말할 것도 없다. <사랑니>의 서른 살 인영은 17살 제자와 사랑에 빠졌다. <모던보이>의 난실은 나타샤, 로라 등 여러 개의 이름으로 여러 남자를 만나고 심지어 그들을 등쳐먹지만, 누구에게도 처단당하지 않는다. 흔하게 말하면 ‘악녀’인데, 악녀란 말로는 부족한 여자들. 차라리 ‘독녀’란 말이 있다면 그럴싸 해보일 것이다.
▲정지우 감독      <출처=씨네21>

  악녀가 그들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사실상 남성적 시선)으로 규정하는 말이라면, ‘독녀’는 그들의 인생 자체를 설명할 수 있는 말이다. 보라와 인영, 난실은 모두 독하게 사는 여자들이다. 그런데 그녀들이 왜 독해졌는가가 중요하다. 단, 여기에서 사회적, 도덕적 규범은 중요치 않다. 최보라의 남편 서민기는 실직한 가장이다. 낮에는 신파소설에 훌쩍이고 밤에는 드라마에 눈물짓는 이 남자는 그녀에게 아무런 만족도, 기쁨도, 안락함도 주지 못한다. 그런가 하면 난실에게는 남들이 다 하는 사랑에 빠지는 것보다 나라를 구하는 일이 더 급하다. 하지만 주인공 해명을 비롯해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철없고 찌질한 탓에 나라를 찾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어쩌면 겉보기에는 꽃뱀이나 다름없는 난실의 행동은 남자들에게서 뺏은 돈을 독립운동자금으로 쓴다는 점에서 대의에 충실하다. 그리고 <사랑니>의 인영. 그녀가 치정적인 사랑에 빠진 이유는 단 한 가지다. 어느 날 갑자기, 어린 시절 첫사랑의 기억이 아프게, 그리고 황홀하게 다시 찾아와 그녀를 휘감아버린 탓이다. 그래서 욕을 먹어도 싼 그녀들이지만, 욕을 던지는 혀끝은 뭔가 옹색하다. 그녀들은 사회적 시선과 별개로 나름 열심히 살고있기 때문이다.
  정지우의 영화는 차마 미워할 수 없는 그녀들 때문에 흥미롭다. 미워하기가 주저되는 순간, 그녀들이 놓인 공간과 주변인물 그리고 그녀들의 내면이 드러난다. 그녀들은 왜 정지우의 영화에 나오는 남자들 보다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가. <해피엔드>에서 보라의 불륜은 IMF란 사회적 분위기에 둘러 쌓여있다. 물론 남편이 실직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녀의 행동이 정당화 될 수는 없지만 불륜의 동기는 될 수 있다. <모던보이> 역시 일제강점기의 경성을 배경으로 하면서 화려한 도시를 만끽하는 이들과 대의에 목숨을 거는 이들을 대조시킨다. <사랑니>는 다른 영화들 보다 여성의 욕망이 가진 본질적인 형태에 접근한다. “그거 불륜이야”라고 말하는 동거남의 충고를 잠시 머금다 뱉는 인영은 자기 안에 솟아난 것들을 억누르거나 뽑지 않고 살아간다. <해피엔드>의 보라와 <모던보이>의 난실이 왜 그렇게 살아야하는 가에 대한 해답이 <사랑니>의 인영일 것이다. 
  정지우 감독이 <해피엔드>로 데뷔하기 전에 만든 단편영화 <생강>의 주인공도 보라, 인영, 난실과 모여 넋두리를 할 수 있는 여자일 것이다. 여자의 남편은 과거 운동권 학생이었고 지금도 노동운동을 하고 있다. 영화 속에서 남편이 하는 일이란 동지들과 모여 술을 마시며 세태를 논하는 것뿐이다. 언제나 말쑥한 정장을 차려입는 그는 자신의 대의에만 빠져있을 뿐, 가정의 생계에 아무런 보탬이 되질 않는다. 한때 동지였을 게 분명한 아내는 그런 남편을 버티며 산다. 부업으로 생계를 잇고, 아이를 키우고, 때로는 주변 사람들에게 악을 쓰면서 남편의 대의를 지탱하고 있다. 그런 아내를 남편은 바라만 본다. 언제 돈이 생기냐고 묻고, 신문 좀 보라고 타박도 한다. 언뜻 감독이 자신보다 약간 윗세대인 선배들의 현재를 비꼬는 듯 보이지만, <생강>은 그들을 버티고 있는 여자들을 찬양하는 영화다. 생강은 한번 씹고 뱉을망정, 그 냄새와 맛은 도저히 잊혀 지지 않는다. 보라와 인영, 난실도 생강의 맛처럼 맵고 쓰게 사는 여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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