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경미 감독의 <미쓰 홍당무>는 이 삽질 때문에 웃기다. 단, 그 웃음에 공감하는 이유는 주인공 양미숙이 시집을 못 간 29살의 못생긴 여자 선생님이기 때문이 아니다. 콤플렉스를 공격적으로 드러내는 그녀의 삶의 방식에 공감하는 것이다. 이런 삽질을 정말 양미숙만 할까? 혹은 29살의 못 생긴 여자만 할까? 그럴 리 없다. 사람은 누구나 콤플렉스를 느낄 수 있고, 누구나 콤플렉스를 화로 치환시킬 수 있고, 그래서 누구나 ‘진상’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삽질은 만인의 것이다. 다만 양미숙은 자신이 진상인 걸 알아도 괘념치 않는 여자일 뿐이다. 물론, 그런 걸 고민할 만큼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사람도 아니지만.
이경미 감독의 단편 <잘돼가? 무엇이든>은 이 ‘진상’의 요체에 대해 묻는 영화다. 주인공 지영에게도 공격은 최선의 방어다. 문학을 꿈꾸던 지영은 어느 해운회사에 취직한다. 돈 때문에 일을 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그만둘 생각을 하고 있다. 적어도 스스로는 고고한 척 산다. 어느 날, 사장은 그녀에게 세무감사를 대비한 탈세작업을 시킨다. 지영은 불법적인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이 상황에 화가 치민다. 하지만 그녀의 화는 탈세 작업을 함께하는 동료직원 희진에게 튕겨간다. 희진이 자신의 업무영역을 침범하는 것이나, 겉으로는 성실한 척하면서 잇속을 챙기는 모습이나 사사건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영화는 이 두 여자의 미묘한 공방을 보여준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자. 사실 지영이 칼끝을 세워야 할 곳은 사장이다. 탐욕스러운 사장 때문에 이 짓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잘돼가? 무엇이든>은 지영의 엇나간 공격성향을 꿈 장면으로 요약한다. 꿈속의 지영은 옷 속에 칼을 숨긴다. 칼끝은 그녀의 목덜미를 향해있다. 이때 옆을 지나가던 누군가가 그녀를 친다. 그 바람에 칼이 지영의 목을 긋는다. 지영은 억울한 듯 따진다. “사람이 다치면 어쩌려고 그렇게 치고 지나가요?” 들려오는 대답은 할 말을 잃게 만든다. “누가 몸속에 그런 칼을 넣고 다니래?” 자, 누구의 잘못인가. 이 장면은 ‘진상’은 왜 ‘진상’이 됐는가에 대해서 묻기만 하는 게 아니다. 잘못된 삽질은 내 발밑을 팔 수 있다는 보편적 진리까지 포함시키고 있다.
지영의 꿈은 분명 양미숙도 꿀 만한 꿈이다. 양미숙 역시 삽질에 열중하다 식음을 전폐하다시피하고 결국 피를 흘리기까지 한다. 심지어 그녀는 자신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양미숙은 “도대체 네가 원하는 게 뭐냐”는 질문에 “바빠서 거기까진 생각을 못해봤다”고 답한다. 삽질이란 그런 것이다. 바쁘기만 할 뿐 남는 것도 없고 배만 고픈 것. 그럼에도 우리가 양미숙의 진상을 귀엽게 봐줄 수 있는 것은 삽질의 에너지를 긍정하는 감독의 시선 덕분이다. 이경미 감독은 삽질도 또 다른 삶의 의지로 본다. 밥 먹고 할 일없이 삽질만 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밥 먹고 삽질도 안하는 것 보다는 낫다는 주의다. 하긴. 그래야 ‘무엇이든 잘 될 거야’라는 순진한 믿음도 가능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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