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의 변용과 ‘다시쓰기’― 탄탈로스의 ‘고통’과 ‘사랑’
신화의 변용과 ‘다시쓰기’― 탄탈로스의 ‘고통’과 ‘사랑’
  • 김준현 불어불문 교수
  • 승인 2010.09.04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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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야기를 꼽을 때면, 많은 사람들이 가장 아름다운 여신을 정하기 위해 왕자 파리스의 손에 맡겨졌던 황금 사과 이야기와 여기에서 비롯된 트로이아 전쟁을 떠올리곤 한다.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던진 황금 사과에는 ‘가장 아름다운 이에게’라는 글이 씌어져 있었고, 이를 두고 헤라, 아테네, 아프로디테 세 여신이 경합을 벌이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주겠다는 제안에 파리스는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황금 사과를 주며, 지극한 권세나 전쟁에서의 승리보다 미녀와의 사랑을 우선시한 파리스의 선택은 유부녀였던 헬레나와의 도피로 이어진다. 이 사실을 알고 분노한 남편 메넬라오스와 형 아가멤논은 그리스 전역의 용사들을 모아 트로이아로 진격한다.
트로이아 전쟁의 총지휘관이었던 아가멤논과 관련되어서는 여러 이야기들이 거론되곤 했다. 파트로클로스의 죽음, 나아가 헥토르의 죽음을 야기하게 된 아킬레우스와의 불화 이외에도 아가멤논은 트로이아로의 순조로운 출항을 위해 딸 이피게네이아를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희생 제물로 바치려고 한 비정한 아버지였고, 10년 동안의 긴 전쟁이 끝나고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아내 클뤼타임네스트라와 정부에게 살해당하는 비운의 남편이었다. 또 아버지 아가멤논의 복수를 위해 어머니를 살해함으로써 복수의 여신들에게 쫓기게 되며, 광기에 사로잡혔던 아들 오레스테스에 대한 이야기 역시 자주 이야기되곤 했다. 하지만 대대로 이어지는 아가멤논 가문의 비극이 소아시아의 왕이자 가문의 시조였던 탄탈로스(Tantalos)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인간 내면의 탐색
끊임없이 산정상으로 돌을 굴려 올려야만 했던, 그리고 언제나 다시 아래로 떨어지는 돌을 바라보아야만 했던 시시포스처럼, 탄탈로스 역시 저승에서 그가 받았던 형벌로 유명한 신화상의 인물이다. 가슴까지 물속에 몸을 담근 그가 갈증에 물을 마시려하면 물이 멀리 흩어지고, 굶주림에 눈앞에 보이는 온갖 과실수들의 나뭇가지를 잡으려 하면 나뭇가지가 하늘로 올라가, 결국 탄탈로스는 어떤 것도 먹고 마실 수 없는 끔찍한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그가 영원한 갈증과 허기에 시달리는 벌을 받은 이유에 대해서는 수많은 설이 전해진다.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훔쳐 인간들에게 선사했듯, 신들의 식탁에서 넥타르와 암브로시아를 훔쳐 인간들에게 주었기에 벌을 받았다는 설 이외에도, 초대받은 자리에서 들었던 신들의 이야기를 인간들에게 발설했다는 설, 물욕에 사로잡혀 자신에게 맡겨졌던 제우스 신의 황금개를 돌려주지 않으려고 거짓 맹세를 했다는 설, 신들의 능력을 시험해보기 위해 자기 아들을 죽여 신들에게 대접했다는 설 등이 그의 형벌의 이유로 거론되곤 했다.
신화는 탄탈로스를 부주의한 자, 절제하지 못한 자, 신의 권위에 도전한 오만한 자로 만들었다. 이후 무수한 시간이 흘러갔으나, 늘 탄탈로스는 자신의 지나침으로 인해 정당한 벌을 받은 자의 모습으로 인식되었고, 그에게 부과되었던 징벌, 견딜 수 없는 고통의 강도는 사람들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12세기 초의 사람들은 여전히 탄탈로스를 그가 받았던 형벌의 이유에 부합하는 ‘탐욕’, ‘인색’, ‘교만’의 상징으로 받아들이곤 했다. 하지만 그러던 가운데, 어느 순간 또 누구에 의해 새로운 해석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이미지가 부여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탄탈로스와 그의 고통은 새로운 방식으로 재해석되며, 그는 새로운 상징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중세 후기의 시인들은 역설적인 처지에 놓인 탄탈로스에게서 ‘사랑’의 화신, 일종의 사랑의 순교자의 모습을 발견하며, 그의 고통은 오뒤세우스의 여정에서 이야기되던 저 위험스러운 카뤼브디스의 고통에 다름 아닌 ‘사랑’의 고통으로 변모된다.
중세 프랑스 작가인 마리 드 프랑스(Marie de France)나 크레티앵 드 트루아(Chr?tien de Troyes)의 작품에서 자주 나타나듯, 또 거친 바다에서 마시게 된 한 잔의 미약으로 인해 쓰라린 고통을 겪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되는 비극적 운명을 노래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야기에서 드러나듯, 중세의 ‘사랑’은 초자연적인 공간과 현실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신비한 ‘모험’에서 시작되곤 했다. 무시무시한 위험을 초래하는 ‘모험’은 치명적인 육신의 ‘상처’를 만들어 낸다. 그런데 이 상처는 어떤 약초나 묘약으로도 치유되지 않으며, 오직 한 여인의 손길을 통해, 한 여인의 ‘사랑’을 통해서만 기사의 상처가 치유된다. 마침내 편력 기사는 모험과 상처를 통해 명예와 사랑을 동시에 얻게 된다. 음유시인들이 노래했던 서정시가 욕망과 매혹을 알려주었다면, 후일의 소설이 될 ‘이야기’(roman)는 연대기적인 구성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 위험과 장애를 통한 사랑의 발견을 알려주었고, 마침내 두 장르의 조우는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사랑의 심리학’, ‘인간 내면’의 탐색을 가능하게 만든다.
 
원형의 비극에서의 울림
<환대>, <시기>, <질투>, <공포> 등 갖가지 추상적인 감정들을 다양한 알레고리를 통해 구체화시킴으로써, 어느덧 ‘이야기’는 기사들의 외부적인 모험을 내면의 그것으로 바꾸어 놓는다. 13세기 이래 연애론의 교본이었던 ??장미 이야기??(Roman de la Rose)는 삶의 갈림길에 위치한 스무살의 젊은이들, 하나의 경계에서 다른 세계로의 입문을 기다리는 이들, 유년에서 성년으로 진입하는 이들에게 사랑의 신의 가르침을 전하며 진정한 연인의 처지를 일러준다. 사랑은 “생기 넘치는 무기력이며, 병색이 완연한 건강, 포식한 배고픔이며 탐욕에 굶주린 만족, 눈물이 뒤섞인 웃음이자 끊임없이 고통 받는 휴식, 감미로운 지옥이자 괴로운 천국”으로 설명되며, 신비한 모험을 겪는 기사나 영웅과 마찬가지로 연인에게는 영웅적인 인내가 요구된다. 연인은 모험을 추구하는 기사와 다를 바 없는 지난한 과업을 수행하게 되며, 마침내 탄탈로스가 겪었던 한결같은 목마름과 허기의 고통은 끊임없이 사랑을 갈망하는 연인의 고통과 욕망으로 전이된다.
??장미 이야기??가 말하듯, 이제 모든 젊은이들이 저마다 어느 순간 새봄을 맞이하게 될 것이며, 신비한 정원 안에서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매혹적인 장미를 보게 될 것이다. 젊은이는 저항할 수 없는 사랑의 힘, 에로스의 화살에 상처받을 것이며, 그의 감정은 환대에서 두려움으로, 질투에서 험구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차례차례 이행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수없이 반복될 것이며, 이러한 모든 단계들, 모든 도정들이 바로 사랑의 계명이자 사랑의 행로가 된다. 중세 말기의 시인 프랑수아 비용(Fran?ois Villon)이 “나는 샘물 곁에서 목마름에 죽어가고” “눈물 속에서 웃으며, 희망없이 기다린다”고 노래할 때, 다시 씌어진 탄탈로스의 고통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형언할 수 없는 형벌에서 비롯하는 것이 되며, 이렇듯 신화의 변용은 원형의 비극에서 또 다른 층위의 비극, 깊이를 획득한 울림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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