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시라이의 최측근이었던 왕리쥔은 비리 단서로 압박을 당하자 보시라이에게 구명요청을 한다. 보시라이는 거절했고 왕리쥔은 보시라이 가족의 비리를 말하겠다며 거래를 제안한다. 보시라이는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당 중앙의 승인 없이 왕리쥔을 해임했다. 분노한 왕리쥔은 기밀문서를 챙겨 미국망명을 시도했다. 미국 정부는 망명을 거부했지만 이 사건은 중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사건으로 보시라이는 왕리쥔을 중국 공산당에 알리지 않고 해임한 것, 가족에 대한 수사를 가로막은 것과 관련해 조사를 받았으며 지난달 15일엔 충칭 서기자리에서 해임됐다. 오는 10월에 열릴 제18차 공산당 대표대회를 앞두고 차세대 지도자군 중 한 사람으로 거론된 보시라이가 권력투쟁에 휘말려 해임됐다고 보는 시선도 있다. 정부관리 기능을 축소하고 시장경제 확대에 초점을 둔 ‘광둥모델’을 추진한 왕양과 보시라이가 차기 당 정치국 상무위원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모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시라이의 해임을 권력투쟁에 휘말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긍정적인 ‘충칭모델’ 속에 창홍다헤이 운동에 수조 원을 낭비했으며 범죄와의 전쟁을 실현할 때 인치적인 요소가 법치적인 요소를 크게 앞섰다는 부정적인 면이 밝혀졌다. 또한 개인의 정치적 이미지 구축에 더 중점을 둔 문제들이 밝혀지면서 지도부는 해임에 합의를 봤다.
성공적인 업적으로 보시라이의 입지는 높였으나 그 업적을 위해 한 일들로 입지를 고정시키지 못한 보시라이. 중국의 국민들은 보시라이를 어떻게 기억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