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폭력, 멀고도 먼 평화
가까운 폭력, 멀고도 먼 평화
  • 정상률 명지대학교 중동문제연구소 교수
  • 승인 2014.09.03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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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휴전 합의, 지속가능한 평화 찾아야

제공/ AP 연합뉴스


가자 공습의 직접적 원인과
이-팔 분쟁의 원인은?

가자 공습의 직접적 원인과 이-팔 분쟁의 원인은?   지난 6월, 이스라엘 청소년 3명이 팔레스티니안 무장단체 하마스의 군사조직인 알 카삼 여단에 의해 살해되면서 촉발된 분쟁으로 인해 8월 27일까지 팔레스타인 측 2140명, 이스라엘 측 69명이 사망했다. 특히 팔레스타인 측 사망자의 80% 이상이 민간인이고, 1/4이 미성년자라는 주장이 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무자비하게 민간인을 학살한다’는 인권 차원의 국제적 비난과 공분을 면할 수 없게 됐다. 이번 분쟁의 직접적 원인은 하마스의 유대인 청소년 살해 사건이었지만, 서로에 대한 폭력은 항상화되어 있었다. 유대인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즉 시온으로 귀향하면서부터 시작된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이하 이-팔) 갈등은 오랜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오랜 기간 동안 지속적인 분쟁으로 서로에 대한 불신과 구원(舊怨)이 심화되어 왔기 때문에 이-팔 갈등의 뿌리를 찾기 어렵고, 갈등 해결도 그만큼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이-팔 갈등의 원인(原因)과 원인(遠因)은 무엇인가.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 디아스포라, 로마 식민제국에 대한 제1차 유대인 반란(66~70년), 제2차 유대인 반란(132~135년)으로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쫓겨나면서부터 1948년 이스라엘이라는 근대 국민국가(유대인 민족국가)를 건설하기까지 디아스포라, 즉 이산(離散) 상태에서 ‘게토’와 같은 난민촌에서 살아왔다. 계몽, 인본, 근대 사회, 그리고 산업 자본주의 단계로 접어들었던 1880년대 전후 시기의 유럽사회에서 유대인의 지위는 크게 개선되었으나, 이 시기에 역설적으로 사회 진화론에 기반한 반유대주의가 급속도로 확산됐다. 동서 유럽에서 반유대주의가 확산되었고, 유대계 프랑스 장교 드레퓌스의 간첩 조작사건, 러시아, 헝가리 등 동유럽 국가들의 공식정책으로서의 반유대주의 정책으로 인해서 유대인들도 근대적 국민국가 건설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번바움(Nathan Birnbaum)이 <자기해방(Selbstemanzipation)> 지(紙) 1890년 4월 1일자에서 최초로 ‘시오니즘’이란 용어를 사용했고, 유대계 프랑스 언론인 헤르츨이 1896년에 <유대국가(Der Judenstaat)>라는 팜플렛 형식의 책자를 출판하여 유대인들의 이상국가를 구상했다. 헤르츨이 다음 해인 1897년에 제1차 시온주의 총회를 개최하면서 유대인들의 근대국가 건설에 대한 열망은 고조되었으나 국가 건설지에 대한 논쟁이 크게 부상했다. 당시 패권국이었던 영국은 우간다안, 이집트의 엘 아리쉬안을 제시했으나 새로운 모세로 명명되던 헤르츨은 유대인국가는 시온에 건설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르다우는 우간다를 거쳐 시온으로 돌아가자는 과정론을 주장했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통치권은 오스만 제국이 가지고 있었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영국, 프랑스의 위임통치 지역이 되었다. 이러한 국제적 혼란 과정에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향토’라고 여기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국가를 건설하기로 하고 몇 명씩 돌아와 정착촌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6년에 영국, 프랑스는 사이크스-피코협정을 통해 팔레스타인 지역을 포함한 중동지역을 분할 위임통치하기로 결정했고, 1917년에 영국 외상 발포어는 팔레스타인 내에 유대인 향토를 건설하겠다고 선언했다.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와 정착촌 건설이 더욱 확대됨에 따라 오랫동안 이곳에서 살아왔던 팔 아랍인과 갈등이 확산, 심화되기 시작했다. 독일과 폴란드 등 유럽에서의 유대인 탄압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극에 달했고, 탄압을 피해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대규모 이주함으로써 갈등은 더욱 확대되어 갔다. 1947년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UN 총회는 두 국가 건설안을 제시했고, 1948년 유대인의 국가 이스라엘이 창설되어 UN 회원국이 되었다. 이스라엘이 창설되자마자 이스라엘은 팔 아랍인을 포함한 주변 아랍 국가들과 전쟁에 돌입했다. 그것이 제1차 중동전쟁이다.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아랍 국가들과 이스라엘 간 전쟁은 1956년, 1967년, 1973년, 1982년(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본부가 있는 레바논 베이루트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시작됨), 2006년(이스라엘-레바논의 헤즈볼라 전쟁)에 발생했고 팔 아랍인들의 유대인에 대한 크고 작은 테러와 테러에 대한 이스라엘의 무자비한 보복으로 유대인과 아랍인 간의 적대감은 계속 심화되어 왔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의 상징인 분리장벽이다.                            제공/ 정상률 교수
















평화협상,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
현 중동 국제정세는?
  몇 차례의 이스라엘-아랍 전쟁으로 고향 땅에서 쫓겨나 난민 신세로 전락한 팔 아랍인들은 PLO, PFLP, PDFLP, 하마스(이슬람저항운동) 등 저항단체를 조직하여 반 이스라엘 무장 독립투쟁을 수행해 왔다. 6일 전쟁으로 알려진 1967년 전쟁에서 패배한 후 아라파트는 PLO-파타를 조직하여 무장 독립투쟁을 수행했으나 1980년대에 비교적 온건화됐다. 대신에 1987년 말에 발생한 인티파다(봉기)를 계기로 아흐마디 야신이 주도하여 무슬림형제단 팔레스타인 지부 조직원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이슬람주의 그룹인 하마스가 자살폭탄테러 등 무장독립투쟁을 주도했다. PLO와 하마스는 지금까지도 ‘협력적 경쟁관계’ 속에서 반 이스라엘 독립투쟁을 해오고 있다. 그런데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PLO 의장이었던 아라파트와 이스라엘 총리 라빈은 1993년에 역사상 처음으로 평화협정에 합의했다. ‘팔레스타인 임시 자치정부’ 건설에 합의한 오슬로협정은 합의사항 이행 과정에서 테러와 테러에 대한 보복이 반복되면서 결국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역을 영토로 하는 팔 국가 건설’ 희망은 멀어져 갔다. 오슬로협정 이후 여러 협상안의 주요 의제는 국경획정과 팔레스타인 국가건설 문제, 동예루살렘의 주권문제, 팔레스타인 난민 귀향문제, 유대인 정착촌 철수문제, 중동지역 평화정착문제로 요약할 수 있다. 오슬로협정이 실행되지 못하면서 사우디평화안(2002), 미국-EU-러시아-UN의 로드맵(2002~2003) 등 여러 평화안들이 제시되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슬람국가’ 건설을 목표로 투쟁해온 가자지역을 근거지로 하는 하마스와 팔레스타인 민족국가 건설을 목표로 투쟁해온 서안지역을 근거지로 하는 PLO계를 분할 대응해왔다. 이스라엘이 하마스의 근거지인 하마스를 집중적으로 포격하는 이유이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팔레스타인 내 두 국가안’을 지지하지만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안을 수용하지 않고 있다. 미국의 오바마 정부는 ‘상호 협의에 의한 합의 하의 1967년 국경선’을 주장함으로써 이스라엘 입장으로 기울어져 있다.

  2012년 11월 29일 유엔 총회에서 ‘비회원 옵서버 단체’의 지위를 가지고 있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비회원 옵서버 국가’의 지위를 부여받긴 했지만, UN 상임이사국의 만장일치를 필요로 하는 정회원 주권국가로서의 지위를 획득하진 못했다. UN 상임이사국의 비토권을 이용한 미국의 적극적인 반대 때문이었다.

 

멀고도 먼 이-팔 평화,
그래도 정의로운 해결책을 찾아야
  이-팔 갈등 기간이 길고, 갈등 심도가 깊었던 만큼 이-팔 간 평화적 공존은 멀어 보인다. 유대인들이 귀향하면서 시작된 갈등, 전쟁, 테러와 테러에 대한 보복의 항상화로 인해 시오니즘 대 하마스의 이슬람주의, 시오니즘 대 PLO의 팔레스타인 민족주의 간에는 깊은 단층선이 형성되어 있다. 일치될 수 없는 민족, 종교, 이념 간 차이, 오랜 기간 동안 쌓여온 구원으로 인해 이-팔 평화 정착은 요원하다. 최근 하마스의 유대인 청소년 납치살해와 이에 대한 이스라엘의 잔인한 보복은 구원의 깊이를 심화시킴으로써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 것이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고, 그만큼 평화는 어려워진다. 2001년 아프간전쟁, 2003년 이라크전쟁, 이란 핵 문제를 둘러싼 국제 분쟁, 2011년 ‘아랍의 봄’과 시리아 내전, 최근 이슬람국가(IS)를 둘러싼 주변 행위자들의 복잡한 이해관계 등과 더불어 이-팔 갈등 문제는 중동 분쟁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평화는 정의의 결과’라고 한 것을 음미한다면, ‘정의로운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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