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책
세상을 바꾼 책
  • 문화평론가 엄경희
  • 승인 2005.05.28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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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새벽

 

금서야말로 그 시대의 주도 권력과 이데올로기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상징물 가운데 하나이다. 권력을 지탱해주는 근본 동력이 이데올로기라면 그 이데올로기를 위협하거나 배반하는 일체의 행위는 권력의 적이 된다. 권력을 양산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 사문난적(斯文亂賊)의 무리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쓸어내야 하는 것이 권력의 기본 속성인 것이다. 이처럼 권력의 존립방식과 금서의 탄생은 긴밀한 관련을 갖는다.

군부독재의 억압과 폭력이 극에 달한 1980년대야말로 수많은 지식인들과 그들의 저작물들이 감금되었던 시대라 할 수 있다. 시인들의 시집도 예외가 아니었다. 조태일의「국토」 김지하의 「오적」, 양성우의 「겨울 공화국」,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과 같은 시집 또한 당시 금서 목록의 한 부분을 차지했던 책들이다. 독재자들은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흘러나오는 뜨거운 분노와 저항의 감정을 묵살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시는 인간의 정서와 감정을 움직이는 저력을 그 안에 내장하고 있는 예술적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 비추어볼 때 노동자들을 선동하는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과 같은 시집이 당시 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저술로 여겨졌으리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노동자들의 삶과 극심한 노동착취의 현장을 이 시집이 생생하게 고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품속의 정형 손은 / 싸늘히 식어 푸르뎅뎅하고 / 우리는 손을 소주에 씻어 들고 / 양지바른 공장 담벼락 밑에 묻는다 / 노동자의 피땀 위에서 / 번영의 조국을 향락하는 누런 착취의 손들을 / 일 안하고 놀고먹는 하얀 손들을 / 묻는다 / 프레스로 싹둑싹둑 짓짤라 / 원한의 눈물로 묻는다
                                                       ?손 무덤? 부분

공장 노동자인 정형의 손이 프레스에 잘린 비극적 사건을 담아내고 있는 이 시에는 노동자를 억압하는 기득권에 대한 시인의 분노가 잘 드러나 있다. 박노해의 시는 시대의 억압과 폭력성을 지식인의 비판적 목소리를 통해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현장을 직접 체험했던 노동자의 목소리를 통해 폭로하고 있다는 특징을 지닌다. 관념이 아닌 사실을, 상상이 아닌 체험을 그는 시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박노해의 이와 같은 시도 이후 많은 노동자 시인들이 탄생하게 된다. 이 또한 박노해의 시가 불러일으킨 변화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그의 시는 80년대 피지배계층의 생활을 사실적으로 증언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유린된 인권을 되찾을 권리가 우리에게 있다는 진실을 일깨워 주고 있다는 점에서, 지식인만이 아니라 노동자의 뜨거운 언어도 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는 점에서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문학적 가치를 지닌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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